[사도행전 26:12~19 |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울의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한 자기변명의 계속된 말씀입니다. 바울이 변명하는 말씀에서 바울 자신의 회심장면을 다시 보게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9장에서 누가의 객관적인 증거로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두 번째는 22장에서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많은 군중들에게 시달릴 때에 천부장의 호의를 받으며 군중들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본문의 행 26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마지막으로 간증한 것입니다. 오늘 이 간증과 함께 바울의 생사문제가 결말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결정적 중요한 시간에 다시 한 번 그는 이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아서 자신이 체험한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하여 증거하게 됩니다. 앞의 세 대목을 대조해보면,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의미까지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귀한 신앙 간증이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체험에 대한 간증, 이 중요한 간증을 바울은 반복해서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지난 날 사도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책임자들로부터, 즉 제사장들과 그 높은 권세자들로부터 사명을 받아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에“대 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위임을 받고” - 위임장을 가지고 저 다른 나라에 도망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히려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을 받는 자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 사도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한 사명을 띠고‘대제사장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의 사자가 예수님의 사자로 변모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러 가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는 사람, 예수 전하는 사람이 됐으니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180 〫로 완전히 달라진 생의 변화를 우리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포로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다른 목적으로 가던 사람인데, 예수님께 붙들렸어요. 완전히 예수 포로가 됐습니다. 이것은 자기 뜻이 아니지요. 자기는 본래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제 완전히 예수님의 강권적 능력에 의하여 포로가 됐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의도하는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사실이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꿈이 아니요, 이야기가 아니요,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어느 개인의 깨달음이나, 어느 누구 철학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교회요, 우리의 신앙입니다. 역사적 사건에 위에 우리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둘째는,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리 생각하고, 남들도 이리저리 생각했지만,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내 일생 오늘까지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한 것, 죽거나 살거나 복음 전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세 번째, “내게 자유가 없습니다.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19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내게는 정말로 자유가 없습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이것으로 끝입니다. 도대체 아무 의견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 앞에 인간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의견도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따르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네 번째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다면 이럴 수박에 없었을 것입니다.’하는 뜻이 숨어있어요.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극악무도했던 내가 됐습니다. 이런 긴 얘기를 다시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시고, 내게 역사하신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이렇게 포로 된 사실에 대하여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3:12절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씀합니다. 잡힌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 1:15절에 보면“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어머니의 태로부터 예정하시고 확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사건은 은혜로 나를 부른 것입니다. 왜요?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거든요. 그런데 은혜로 나를 부르사 내가 주의 사람이 되고,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라는 깊은 자기 정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사도바울은 오늘 이 시간에 이 사건의 역사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13절에“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사람이 다니지 않는 뜨거운‘정오’에 사막 같은 뜨거운 길을 갔으니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극악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밤에, 비몽사몽간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오’요, 대낮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정오’는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14절에‘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동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13절에“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이것은 공동적인 것이요 다 같이 본 것입니다. 다 같이 쓰러졌습니다. “‘우리’가 땅에 엎드러져 (14절)” 이게 또한 중요한 거예요. 환상이야 혼자서 보지, 다 함께 보지 않잖아요? 이런 의미에서‘우리’라는 말은 이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내려와서 우리가 땅에 엎드러졌다. - “우리가” “가던 일행 전부가”라는 말입니다. 무릇 우리가 무슨 일을 공동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는가 하면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히브리말로 14절에“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여기에 사울로서는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나는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언제 핍박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때,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니라.”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일하는 주의 종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핍박하고 시기하고 저주하는 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고 시기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하기 싫은 말이지만, 저는 그런 사람들이 암병에 걸리고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이런 관계를 분명히 알고, 회개하고 돌아서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지은 죄를 끊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무서운 경고의 말입니다.
그 다음 본문에 보면 14절에“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우리 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의미의 말씀입니까?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는 속담의 하나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의 풍속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소나 말을 길들여가지고, 처음으로 길을 가든지, 멍에를 매어가지고 끌고 갈 때 짐승이 앞에 가고 주인이 뒤 따라 갑니다. 그 때 그 짐승이 아직도 길이 덜 들여져서 순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인을 골탕 먹이려고 그 짐승이 뒷발질을 해요.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주인은 송곳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뒤에다가 놓아두어서 뒷발질하면 딱 찔리게 합니다. 몇 번 찔리고 나야 정신 차려서 뒷발질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놈아, 내가 너를 붙들었는데, 너 왜 뒷발질하느냐”그 말씀입니다. “가시채로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뒷발질하면 할수록 저 손해지요. 가시에 찔리니까. 그러니까“얘야, 버둥거리지 마라. 내가 너를 잡았다. 고분고분해라. 이놈아, 딴 생각하지 말고 따라 와라. 뒷발질하다가는 네가 당한다. 그런고로 행여 뒷발질 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 내가 너를 붙들었으니, 그냥 따라와라”하고 딱 부러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경황에서도 당돌합니다. 15절에“주님 누구시나이까?” 아무튼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그 말씀입니다. 이제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15절에“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끝입니다. 다른 질문이 필요치 않아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부활하셨어요.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나를 부르시고 계셔요. 더 이상 확인할 것이 없고, 이것으로 상황 끝입니다. 바울은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누구시나이까?” 이렇게 확인하는 용기를 보면 바울이란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황이라면, 우리는 확인 같은 것은 해 볼 엄두조차 못 내는 게 보통입니다.
오늘 본문 18.8절을 자세히 보면 바울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17절에“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먼저,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보냄 받지 않고는 전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롬 10:14,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보냄 받는 자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행 26:18절에“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게 하고”여기에 중생케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생각을 돌리고, 생의 의미를 바꾸고-이것이 구원입니다. 중생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 지금까지 마귀가 왕 노릇하는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권세에서 벗어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18절은 계속해서“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죄사함을 받고”-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 다음에“믿어 거룩하게 되어”-성화, 믿어서 거룩하게 되고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확실한 구원론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게 하리라”-이것은 하늘나라의 기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확실한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6절에“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9장에 보면, “다메섹로 돌아가라. 네가 이제 앞으로 할 일을 네게 말할 자가 있으리라”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보냅니다. 바울의 의견을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명령만 하십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증인이 될 거이다”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오직 주님의 사람으로만 평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그는 복음만을 전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로마 감옥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영광은 오직 하늘에만 있을 뿐입니다. 칭찬도 하늘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2 제자가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우리가 나가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자랑할 때에 귀신이 나갔다고 기뻐하지 말고, 병자가 나았다고 기뻐하지 마라.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그 한 가지만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중요한 결론인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19절에“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거역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거역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순종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