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25-35 | 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이 세상의 무서운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시기, 질투라고 생각됩니다. 시기 질투하기 시작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이 죄가 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큰 죄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시기하는 것을 큰 죄로 생각하지 않고, 질투하는 마음을 크게 회개해야 될 죄라고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기 질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살인까지 이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시기 질투 대문에 바울을 해쳐 찢어 죽이려 합니다. 로마 당국은 도저히 바울을 예루살렘에 더 둘 수가 없어서 밤을 틈타 몰래 가이사랴로 호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내용입니다.
23절에 보면 바울 한 사람 때문에 470명이나 되는 많은 군사가 동원되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바울을 감시하거나 도주할까봐 경호하기 위해서 동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들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도바울이 적어도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 일도 없이 피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의 관심은 바울이 사느냐 죽느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죄목을 정하지 못한 더구나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피살된다면 시끄럽지요. 그렇게 되면 백부장이나 천부장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고로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직위와 안전을 위해서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바울을 호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천부장의 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25절에“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이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쓴 사람은 천부장입니다. 예루살렘의 질서를 보호하고 군사로 지키는 사람은 천부장입니다. 그리고 유대 지방 전체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입니다. 식인지의 지방에는 총독이 있고, 그 밑에는 천부장이 있고, 다시 그 밑에는 여러 백부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편지는 천부장이 자기보다 권세가 높은 총독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유대 지방의 로마 총독부가 있는 곳은 내지에 있는 좁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큰 항구 도시 가이사랴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가이사랴는 로마 군인의 군사 본부로 벨릭스 총독이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이 가이사랴에 있는 보다 상위기관인 총독부로 바울을 호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천부장의 편지 내용을 좀 생각해 봅시다. 26,27절에“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천부장의이름입니다. 그는 자유민으로 태어나 자기의 힘으로 로마 군대의 제일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천부장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그는 서신에서 총독 벨릭스에게“각하”라는 존칭으로 호칭하면서 정중하게 문안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보내는 경위를 간결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가 바울을 보호하고 살려 준 이유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편지에서 자기는 유대인들에게 위협당하는 로마인의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천부장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습니다. 만일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암살당하거나, 피살되고 만다면 자기 목이 달아나고 맙니다. 너는 어떻게 로마 사람 하나 죽는 것도 보호하지 못했느냐 하는 책임 추궁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시끄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가 살해 될까봐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보냅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맡아서 하시오. 자기는 쑥 빠지고 책임을 총독에게 넘깁니다. 내가 관할하는 이 예루살렘 영내에서 그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 속셈에서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 지방의 총독인 당신에게 호송한다는 얘기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바울을 위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바울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영달과 안전을 위해서 인 것입니다.
29, 29절에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인고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을 강조한 후, 이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하여 그를 공회에 까지 동행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 총독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율법 같은 문제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 총독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은 식민지인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해서 정치적 반기를 들거나, 억압으로 인하여 폭동을 일으키지나 않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은 바울이 송사된 것이 로마의 법이 저촉되어서가 아니라, 다만 유대인들의 율법에 관한 문제이므로 로마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로마법에 의해서 바울을 죽이거나 결박한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30절에“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마지막으로 천부장은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로마시민을 유대인들이 죽이려하므로,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독에게로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천부장의 보고 내용에는 총독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부장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바울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이 되었습니다.
31,32절에“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바울을 호송했던 군사들 중 보병은 바울을 호위하여 안디바드리에 이르렀습니다. 안디바드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안디바드리에 이른 호위 군대는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칠 수 없는 안전한 곳에까지 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병은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를 되돌아가고, 마병이 남은 거리의 호송을 맡았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로 호송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가지 바울의 신변 안전이 철저히 보장된 가운데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33,34절에“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가이사랴에 도착한 군사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천부장의 편지를 전달하고, 바울을 총독에게 인도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총독에게 직접 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총독은 바울에게 어느 영지 사람이냐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어느 관할 구역에 속한 사람인가를 확인하여 그 죄인을 소속된 영지에서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총독은 바울이 로마의 영지인 길리기아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35절에“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길리기아는 로마의 직접 통치 구역이므로 바울의 재판은 벨릭스 총독이 직접 담당해야 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송사한 사람들이 도착한 후에 사건을 심리하고자 했습니다. 한편 총독은 루시아의 편지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대해서는 잘못이 없음과 로마시민인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헤롯 궁에 감금하여 보호하였습니다. 헤롯 궁은 헤롯 대왕이 자기의 세도를 과시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크게 지은 궁전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 및 본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착하고 선한 일은 서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은 남에게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이 때가 천부장이 정말로 귀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듯 비겁하게 남(총독)에게 맡기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게 아니에요.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돈 있을 때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천부장이 조금 더 마음을 넓히고 백부장과 더불어 바울에게“당신 도대체 누구요?”하고 하룻밤 얘기하면서 말을 들었더라면 그도 예수 믿었을 것이고, 엄청난 일을 한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었는데 …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는 쑥 빠졌습니다. 천부장 노릇을 몇 년이나 더 해 먹을지 몰라도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오네시모 같은 노예도 바울을 한 번 만나서 예수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은 안타깝게도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다시 말하면, 착하고 선한 일은 빨리 서둘러야 하고 그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선한 일을 하려면 언제든지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얼마간의 희생이 없이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손해를 좀 봐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챙기고 좋은 일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자기 이득을 보려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체험하고, 바울의 복음을 영접하려면, 적어도 바우과 함께 상당한 부분의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마 천부장이 자기희생을 조금만 더 했더라면, 얼마나 귀한 일이 많이 진척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손에 아무것도 묻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명예를 얻어가면서 하려고 하는 생각은 안 됩니다. 우리 주위와 환경을 살펴보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상처도 입을 수 있고, 누명을 쓸 수도 있어요. 엄청난 손해를 입을 수도 있어요. 이것을 언제든지 각오해야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신앙인이 아니고는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천부장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다. 며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요.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이고 로마사람답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어요. 그 좋은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복음을 몰라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의 그 놀라운 체험을 생생하게 들으면서도 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이 천부장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설교를 조금 더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일을 이렇게 처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건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할 수 있어요. 대단한 위인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을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야 진실도 가능하고, 선한 일도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천부장은 유감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왜 이런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묵묵히 참습니다. 또 당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먼 훗날, 그 언제가 이 모든 일들이 왜 있어야 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