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1-11 | 김남수 목사]
바울은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체포되어 지금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의회는 빌라도의 법정보다 더 잔인한 법정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거짓 증인을 세워가면서 재판을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공의도 진리도 신앙도 없는 재판정입니다. 여기서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보나마나 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서서 사도 바울은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미 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용기 있고 담대하게, 할 말은 해야겠다고 각오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마지막 기회요 귀한 시간입니다.
그는 간결하게 변명을 합니다. 1절에“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특별히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양심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경건한 신앙 위에 선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중에도 정결한 양심이란 말이 나옵니다. 양심이 빗나가면 모든 일이 다 빗나갑니다. 양심이 빗나가 있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시간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이렇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은 무슨 철학의 문제나 어떤 의식이나 사상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인 것입니다. 즉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입니다. 결코 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양심을 따라”이 말은“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양심의 자유를 따라 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양심은 부정적인 면과 극정적인 면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부정적인 면은 두려움으로, 긍정적인 면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후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한테 끌려서, 죄책에 끌려서 … 이렇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야말로 깨끗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오늘까지 수고해 왔노라.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 다음,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는 신앙적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가 내게 계시하셨고, 그가 나를 부르셨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인도하셨고, 내가 아는 율법 - 그 진리를 따라 내가 행했다 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확실한 신앙적 의지 안에서 내가 오늘까지 수고했노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깨끗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분노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당장에 저 놈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냈을까?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바울을 죄인으로 잡아 놓고 있습니다. 정죄하려고 합니다.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죄인으로 취급해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의인이라는 것예요. 잘못한 게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이 노출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바울의 당돌함에 대해서 그는 벌써 그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대제사장이 부드럽지 못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니까 당장에 2절에“그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죄 됨을 판단하고, 죄가 있을 때에 매질(태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를 정하지도 않고, 말을 다 들어보지도 않고, 입부터 치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또 바울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한 것이 어째서 죄가 됩니까?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입장에서 볼 때에 바울이 벌벌 떨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든지, 지난날에 잘못했다고 하든지, 어쨌든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너무 당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양심을 하나님 음성으로 해석합니다. 양심은 경건한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도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하는 말씀이,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저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그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렇게도 전혀 다르게 참람한 비방하는 죄로 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분노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서 정말로 잘못한 바가 없다면 그를 죄인이라고 끌어다 놓고 죄인을 만들려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쪽이 죄인이 되는 것예요. 피고의 입장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내가 죄가 없노라”고 한다면 그를 끌어 온 재판장이 그 순간 당장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재판한 빌라도는 그 자신이 죄인입니다. 결국 자기의 죄 됨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없는 바울의“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하는 선언을 들으면서 제사장 자기의 죄 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면적으로 제사장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비양심적인 제사장을 심판하는 선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렇게 발작을 하게 됩니다. 분노한 나머지 그 입을 치라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예) 오늘날 이러한 일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 잘못된 일을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의롭습니다. 저가 의로운 때에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가 죄인이라고 책망하고 있는데, 저가 옳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나쁘고, 내가 바르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하는 그런 비판하는 말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문제 때문에 말없이 남을 비판하고 남을 심판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반항합니다. 3절에“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으로는 멀쩡한 제사장이지마는 속에 악이 있구나.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재판하는 네가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으니, 너를 치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말입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 3절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엄청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대단합니다. 아주 용기 있는 태도입니다.
이런 때에 누군가 옆에서 말합니다. 4절에“하나님의 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그 때에 사도 바울이 5절에“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하고 말씀합니다. 옆에서 저가 제사장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곧 말을 돌립니다. 출 22:23을 인용해서 말씀합니다. 5절에“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성경은 제사장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그가 제사장인줄 모르고 비방한 것이지, 그가 제사장인줄 알았다면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대제사장에게 팔리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원고가 되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은 바리새인들보다 제사장이 훨씬 더 악합니다. 악의 근본입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이여,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라고는 말씀하셨지만,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기름 부어 세워진 자는 제사장들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체포되어서, 제사장에게 고소를 당하시고, 제사장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생각해서“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보면은 바울이“어쨌든 간에 저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건이자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나름대로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썩 좋은 지혜는 아닙니다. 바울이 주위를 보니 한 쪽은 바리새인이고, 한 쪽은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서로 원수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움을 붙입니다. 6절에“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내가 부활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바울이 전하는 교리에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사두개인들은 인간의 의지를 중요시 여기고,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중요시 여기고, 인간의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영적 존재를 볼 때에도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악마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영을 다 믿고 있습니다. 성경도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요샛말로 사두개인들은 여당이고, 바리새인들은 야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바울이 바리새인편을 듭니다. 바울이 본래 바리새인이지요.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 있다고 믿고, 부활이 있다고 주장해서 이것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합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보세요. 9절에“크게 떠들 새”그들이 서로 떠듭니다. 바리새인들은“그것 봐라 부활이 있다” 사두개인들은“부활이 없다”고 합니다. “있다, 없다”그 자리에서 왈가왈부하며 크게 떠듭니다. 9절에“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벌써 싹 바뀌었어요. 바리새인들이 바울 편으로 돌아와서 한 마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합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를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천사가 바울에게 말하고 성령이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합니다. 이렇게 바울을 옹호합니다. 자, 그래서 옹호될 것 같습니까? 바울의 말씀으로 해서 바리새인들은 어느 정도 바울 편을 들어주고 옹호해 주고 밀어 주려고 하지만, 이것을 본 사두개인들은 더 악해집니다. 제사장파에서 더 극악해 집니다. 이제 좌우를 돌아 볼 필요가 없어요. 바울을 찢어 죽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 10절에“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하니 영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이 죽음을 면했다 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그 자리를 모면해 보려고, 작전 계획을 세워봤지만 결국에는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고 위로하실 때에“너 왜 쓸데없는 짓 했느냐”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는 것도 그랬고, 달리 여러 가지로 이 방법 저 방법을 써 봅니다마는 다 좋지 않은 일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전적으로 신앙으로 말미암는 행위는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이런 인간적인 연약한 점이 있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크게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을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사두개인들이 더 악해집니다. 이제, 정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는 석방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다음에 보겠습니다마는 바울이 석방된다면, 암살해 버리겠다는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주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어요. 자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바울이 유대 땅에는 머물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로마로 가게 됩니다. 정말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본래적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이렇게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에 주께서 그의 곁에서 이르시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날 밤에”-이것이 어느 때입니까? 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시간입니까? 그리고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이르십니다. 11절에“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먼저,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재판 받을 때에 옆에 섰노라 하심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 이 말이 헬라어 원문에 365번 나옵니다. 이 말씀을 연구한 학자는 성경에 365번 나오는 것은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재미있는 말입니다. 어쨌든 주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고 말씀하실 때, 용기를 주십니다. 이제는 용기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주께서는 용기의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그런데 이상한 것은 로마에서 어느 달 어는 날에 서리라, 어떤 과정을 통해 가리라 하시는 말씀은 없습니다.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는 것은 분명한데, 그러나 어느 달 어느 날에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이 있는 2년 후에 로마에 갑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파손되어 어려운 고생을 치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너는 로마로 간다, 가는 것은 틀림없다. 주께서 허락해 주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또 이것은 약속적인 신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에 가나안을 네게 주마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주리라 하십니다. 그러면 주시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언제에 로마에 가든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바울에게 이 신앙을 확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로마에 간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리라. 그러니 너는 살아남을 거야, 누가 너를 때린다고 맹세해도 걱정하지 말라. 누가 너를 죽인다 해도 절대 죽지 않는다 하심입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주인공은 절대로 안 죽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살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happy ending입니다. 결국에 그는 로마까지 갑니다. 주님께서는“누가 이를 갈든, 욕하든, 저주하든, 걱정하지 마라. 너는 로마에 간다. 그 곳에서도 나를 증거하리라”라고 약속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고로“담대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