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22-30 | 김남수 목사]
2주에 걸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난 군중 앞에서 신앙고백적으로 자신이 체험한 사실을 간증적으로 설교하는 내용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생한 자기 경험이요, 사실이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나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주신 경험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많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이것을 믿는 순간에 당신들도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당신들도 예수님을 믿으시오, 나와 같이 이렇게 되시오.”라는 말을 해야 할 순간에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이 말하는 것을 저희가 듣다가”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중단시키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자가 아니라”하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23절)”사람들이 티끌을 날렸다 합니다. 악에 차서 지금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그 옛날 스데반을 죽일 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티끌을 날리며 막 달려들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고마운 것은 천부장이 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가 천부장이 영문을 몰라 바울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위기에 처한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주장하여 고문을 면한 것입니다. 다음날 천부장은 바울을 공회 앞에 세웁니다. 바울의 설교는 분명히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모르면 몰라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은 숨겨지고, 반대로 극악한 사람들, 사나운 사람들만이 소리를 지릅니다. 똑같은 복음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복음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좋은 진리도 어떤 충고도 그렇습니다. 어떤 귀한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한 쪽에서는 수용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반대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착하게 받아들이고, 반대하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인해서 더 악해집니다. 우리 교회가 목동에 있을 때, 주일날 설교를 하고 나면, 왜 내 죄를 공격하느냐고 누가 고자질했느냐고, 그것을 분명히 알고 말한 것이라고 뒤에서 불평들을 했습니다. 죄가 지적되었으면 성령이 역사하신 줄 알고 회개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필시 어느 사람이 고자질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중 하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누군 줄 모르고 하지만,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말씀이 생각나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도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완악해지고, 더 굳어지고, 더 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작심하고 저렇듯 악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이렇게 죽이겠다고 하는데, 정말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너 죽고 나 살자” 라는 정도도 아니고, 숙제 “너 죽고 나 죽자”합니다. 이것은 그저 저 사람이 미우니까, 저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겠다는 얘기입니다. 참 미련한 노릇이 아닙니까? 아무튼 그 때에는 사형집행이나 사형판결은 반드시 로마법에 의하여 시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에 바울을 지금 돌로 쳐 죽이면, 저들도 로마법을 어기게 되므로 살인죄로 죽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이 완악한 순간은 “저 사람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다 보면 이 지경에 이릅니다. 저 죽는 것은 생각 밖이에요. 미운 마음이 죽음에 대한 생각에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할 만큼 미련스러워집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바울을 지금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그런 악랄한 마음에서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저들은 왜 바울을 없애고자 할까요? 일찍이 예수님을 그렇게 했듯이, 오늘에 와서도 왜 바울을 없애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야고보를 죽이고, 이제 와서 바울을 죽이겠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같은 유대인으로서 동질적인게 많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율법을 숭상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같은 선민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꼭 죽여야겠다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귀중한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방 사람을 유대 사람과 동등화게 취급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이 상대적 가치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사실상 유대 사람은 이방 사람을 별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상가들에 의하면, 특별히 유대 사람들이 쓴 많은 문학작품 중에 이방 사람에 대한 미움을 주제로 다룬 것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독일 나찌당들이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도 그들은 독일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은 바벨론 포로로도 있었습니다. 그밖에 유대인은 이방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곤욕을 치렀습니다. 수난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문학이나 저들의 사상에 이방인을 미워하는 구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을 멀리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십니다. 이런 면에 저들은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구원 문제 있어서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에누리가 없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집이 있습니다. 이 선민사상만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선민으로서 이방 사람을 불쌍히 여겨 함께 사는 것이지, 이방 사람이 선민과 같다는 얘기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네를 이방 사람 취급하는 것은 절대로 참지 못합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킵니다. 10계명을 알고, 또 천사가 계시해 주었다는 613가지 계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것은 먹지 말아야 되고, 이것은 먹어야 되고… 많은 계율을 지키느라 애쓰고, 그것으로 인해서 유대인의 긍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처럼 깨끗하고 정결하고 의롭게 공로를 세워서 하나님의 사람 된 높은 위상을 지니고 살고, 구원을 받는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것을 보니까, 이방 사람들 – 개처럼 살고, 짐승처럼 형편없이 살던 사람들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유대인이 볼 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하며 웃습니다만, 사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자기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즉 서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이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당신도 천당 갈 것이고, 저 사람도 천당 갈 것인데, 그래 천당 가서도 싸우겠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당도 분명히 윗자리, 아랫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는 저 사람하고 천당 가서도 안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유대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것을 전하는 바울, 저 사람은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더 완악하다는 지적을 저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8절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을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한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말씀하십니다(21절)”“이방인에게 보내리라” -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겠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인즉, 유대 사람이 완악하다는 뜻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강퍅해서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너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주 내용은 완악함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람들보다 더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수용함에 있어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못마땅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 사람이 같다고만 해도 기분이 나쁜데, 이방 사람이 더 낫고, 이스라엘 사람은 복음에 관한한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저들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찔림을 받을 때에 회개하지 않고, 반항하면서 완악해집니다. 마음이 더 굳어집니다. 게다가 이방인과 자기네를 비교한 논리, 이것이 더욱 더 마음에 안 들었어요. 사실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이 있는데서, 더구나 로마 사람이 있는데서 유대 사람을 완악하다 이방 사람이 더 낫다는 비판을 해 저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사도 바울의 하는 말마다 그를 꼭 죽일 수밖에 없는 소리로 들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한 늑대가 숲속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조그마한 양 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오라, 저것을 잡아먹어야겠다.”라고 늑대가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늑대가 체면이 있어서인지 그냥 잡아먹을 수는 없고 해서 양에게 말을 겁니다. 시비를 거는 것이지요. “어째서 너는 내가 먹을 물을 흐리고 다니느냐? 물을 흐리는 너 같은 놈은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까 어린 양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늑대님, 당신은 냇물 상류에서 마셨고, 나는 하류에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늑대님이 마시는 물을 흐리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거 말이 됩니다. 그러나 늑대는 이에 지지 않고 말했습니다. “네가 일 년 전에 나에 대해서 못된 소문을 퍼뜨린다는 것을 내가 들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랬더니 양은 “일 년 전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늑대는 말을 합니다. “너의 아버지가 날 못됐다고 헐뜯고 다녔다. 그런고로 너를 잡아먹겠다.”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잡아먹기로 작정했으니까 이젠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없다는 뜻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이젠 무슨 말도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변명도, 무슨 논리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없애버리므로 해결하려 합니다. 다시 말하면, 더 큰 죄를 지어서 해결하려 합니다. 죄를 지어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 시간에 바울이 말씀하는 복음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것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저놈이 살아있으면 내게 이로운 가 해로운 가, 이것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실리적입니다. 결국은 의를 짓밟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니, 천부장이 저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권력의 남용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으로 끌어들이고는,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바울을 가죽줄로 묶고 때리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군중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니까 응당 군중에게 그 이유를 물어야 될 것입니다. 왜 죽이려고 하느냐, 무슨 죽일 죄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군중에게 묻지 아니하고 바울을 치려고 합니다. 또, 바울에게 먼저 물어봐도 됩니다. 바울이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데, 먼저 저를 때려서 물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때린다는 것은 벌써 체형이 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문입니다. 사실을 떠나 거짓이 될 때에 고문이 있는 것이지, 사실을 말하는 사람에게 고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는 죄를 정하고 벌을 주어야지, 벌부터 주고 죄를 묻는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부득불 마지막 카드를 내놓습니다. “나는 로마 사람이요”라고 말합니다. 로마시민, 로마시민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시민에게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에게는 절대로 체형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이 유대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같은 체형이라도 목 베임을 당했고, 십자가에 죽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시민은 군중 앞에서 매질하는 것은 절대로 없었다고 합니다. 왜인고하니, 로마인 된 체면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마인에게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또 로마시민의 자격에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군인으로 나가서 공로를 많이 세웁니다. 심지어는 군인으로 7년, 10년 이상 공로를 세우게 되면 이방인이라도 제대할 때에 로마시민권이 주어집니다. 둘째로, 돈을 많이 내면 로마시민권을 살 수 있습니다. 요샛말로 투자이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로마시민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출생적으로 로마시민이 됩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지금 당장 큰 체형을 치를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시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여기서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오늘 다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됩니까? 왜 이 군중들은 완악해져야 됩니까? 바울은 왜 매를 맞아야 합니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먼 훗날에 바울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빌1:12에 보면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나의 당한 이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억울한 고생을 합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생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오늘의 모순적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욥은 욥기에서 말씀합니다.“내가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의 이 고통을 겸손하게 온유하게 믿음으로 잘 참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