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12-21 | 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자기를 죽이려는 군중 앞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담대하고 그리고 성실하게 주님을 만나 중생한 체험적인 증거에 이어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에 대한 체험적인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몇 사람이나 회개하게 될는지, 어쩌면 진주를 개한테 던진 격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설교하던 모습이 바울의 마음에 역력히 떠올랐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에게는 그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오늘도 죽이려는 군중들 앞에서 담대하게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특별히 체험한 사실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가리켜 고백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고백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무릇 말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 “~같다”라는 말이 많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런 것 같습니다’ “~같다”라고 말하려면, 차라리 집어치우세요 하고 싶습니다. 권투 시합을 하는 권투 선수를 볼 때, 경기 도중에 선수가 손을 허공으로 내 지를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해설자는 “저렇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중이 실리지 않았거든요”라고 중개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한마디 말속에 정말 인격이 실려야 하고, 진실이 실려야 하고, 신앙이 실려야 합니다. 내가 평생에 생각하던 진리, 내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앙 고백이 거기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 마디라야 권능이 있습니다. 어디서 들은 얘기, 신문 한구석에서 읽은 얘기, 이런 얘기가 무슨 힘이 있다는 말입니까? 권투 선수 체중이 실린 것처럼, 말에는 인격이 실리고, 진실이 실리고, 신앙고백이 실려야 합니다. 어쩌다가 한 번 해 본 생각이 아니라, 그 말에 내 신앙고백과 운명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설교는 큰 의미가 있는 설교입니다. 신앙 고백적 설교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의 설교는 간증적 설교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설교할 때 청중의 눈을 보면, 내가 실제로 체험한 것을 얘기할 때에는 청중의 눈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귀를 쫑긋하고 집중해서 열심히 들어요. 잘 먹혀듭니다. 내 경험이요, 사실이요, 내 고백이요, 내 간증이니까요. 자기의 경험이란 이렇듯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남의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 시간에 오직 “내가 이렇게 되었고, 내가 이렇게 경험했노라”하는 중요한 간증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자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내가 있다”라는 선택 교리적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강권적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며, 바울의 길을 딱 막고 심지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면 네게 와서 이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대로 하라”라고 하십니다. 바울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습니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강권적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선택의 교리, 예정의 교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이 깊은 사람은 늘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아무 자유가 없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의 뜻의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대며 멀리 가려고 애썼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리치고 저리치고, 아주 강제로 붙드셔서 오늘의 내가 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 바른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선택의 교리 안에서 바울에게 있었던 것을 봅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와서 말합니다. 14절에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선택하여”라고 합니다. “너를” - 개인적입니다.
첫째, 선택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너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바울은 이 사실을 뒤늦게 깊이 깨닫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내 어머니 태로부터” - 그러니까 의식이전이요, 공부하기 전에, 깨닫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선택하셨다 함입니다. 또 선택은 은혜로운 선택이라고 엡1:4에서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사”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합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이 선택 교리는 이렇게 은혜로운 선택이라고 설명합니다. 선택은 개인적인 의나 무슨 자격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처음부터 나를 선택하셔서 개인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계셔서 나를 이 세상에 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계획 속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고 하는 중요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이 선택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예정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예정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사명의 문제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서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개인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 안에 바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비록 하찮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비밀한 말씀입니다만, 이 선택의 기준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1:12에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를 때 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충성과 진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진실은 있고 볼 것입니다. 좌우간 어딘가 확신이 있고 열심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율법에 대해서는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경건에 대해서는 생명을 걸 만큼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점을 보시고 “그것 쓸 만한데? 방향만 돌리면 괜찮겠는데”하셨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다음부터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기본적인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 진실입니다. 이런 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자격이 있어서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선택하시고, 그 뒤에 자격과 능력을 주십니다. 모세를 모십시오. 모세가 80세에 하나님께 부름받았지만, 이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다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먼저 바로의 궁에 보내어 40년 동안 공부하게 하시고, 광야로 내 몰아 40년 동안 목자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훈련시킨 다음에 “자, 이제 내 백성을 건져라”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사실을 모르고 대답하니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지만 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어눌한 사람입니다.” 자꾸 꼬리를 빼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뇨? 내가 가라면 갈 것이 아니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다 알 것 아니냐, 네가 말을 잘 못하니 말 잘하는 네 형을 동반시켜 주마” 보세요. 그런고로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자격이나, 우리가 가진 능력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선택이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훈련시키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 후에 그를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선택하셨는가? 그 선택의 구체성을 본문의 14절에서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첫째,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자신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영감입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바울 신학의 특성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바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알게 하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구원의 교리를 법적 관계에서 이야기되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계시의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중요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믿음을 생각할 때에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이러한 일반적 믿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믿음에 대하여 아주 깊이 분석적으로 이해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이 맥락을 그의 교리의 중심 맥락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둘째,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의인이 누구냐? 행 3:13~14에 보면, 그는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고, 죄인의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보게”하셨습니다. 절대로 그분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가 계시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선택한 바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큰 진리입니다.
셋째,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을 바울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한 폭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계시 받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한 대머리 영감이 감옥에 앉아서 성경을 쓰고 있습니다. 손은 땅에 있지만, 생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쓰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화가 「렘브란트」의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들으면서 성경을 썼고,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준 것입니다. 우리도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듣는 것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40일 밤낮을 동행했고, 하나님의 지시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레위 사람들과 불신앙적인 사람들이 종종 이에 대해서 반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저 사람 모세를 통해서만 들어야 되느냐고 따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하고, 너희는 모세를 통해서 들어라, 나는 모세와 대면할 것이고, 모세가 나를 보고 나에게 들으리라”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표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택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대표적으로 듣고, 그래서 설명을 하고, 바울은 이렇게 선택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직접 들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택한 자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증인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선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인을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알고, 바울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고, 바울을 통해서 그 사건의 증거를 내가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사건이, 내게 주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선택의 교리, 이 신앙에 사도 바울은 완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저 끌려간 것뿐이고, 충성한 것뿐이다, 이것이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러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나를 어디로 부르셨는지, 무엇을 위해 부르셨는지, 분명히 깨닫고 나의 온 운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