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3~27ㅣ김남수 목사]
선교 여정에 급한 바울은 에베소에 들리지는 않았으나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를 하였습니다. 고별설교의 내용은 1. 에베소에서의 자신의 선교활동을 회상하고(18:27), 2. 장로들에게 부탁한 후(28-31), 3. 미래에 대한 의탁으로(32-35)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드릴 말씀 부분은 에베소에서의 바울 자신의 선교 활동의 회상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라”합니다. 왜 급히 예루살렘에 가려고 애썼을까요? 예루살렘에 여러 해 동안 흉년이든 것으로 인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바울이 각 지방에 다니면서 헌금을 모았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을 위해서 연보를 한 것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을 위해 헌금한 것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귀한 일입니까? 헬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귀한 일을 해 놓았기 때문에 헌금을 그저 인편에 보내지 않고, 바울이 직접 가지고 가서 “이것은 이런 이런 성격에서 이렇게 귀하게 연보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물질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이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유대인들에게 좋은 얘기만 들은 것이 아니라, 오해도 많았어요. 이런 일로 인해서 많은 유언비어들이 있었고, 잘못된 평판도 있었어요. 그래 예루살렘에 가서 그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변명을 하고 싶은 거예요. 오해를 풀고 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동안 선교를 하면서 여기 저기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어가고 있는지, 그런 실상을 가서 보고하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이 이 보고를 듣고, 이 세계적인 교회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하며, 소위 그리스도인 나라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셨다고 하는 증거, 그 귀한 사역의 실적을 가지고 가서 친히 보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일단 일대의 선교보고를 마치고, 2년 후에 로마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가는 길에 그는 밀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에베소에 들리면 3년 동안 머물면서 선교한 곳이라 할 말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에베소에 안 들어가고 밀레도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오라고 부릅니다(17절). 초청을 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장로 presbyterian은 노인이요, 감독이요, 윗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혹은 대표자란 뜻입니다. 장로교의 장로라는 직분이 그 당시에는 아직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유대 사회에 장로라고 하는 어른이 있었으니까, 그 풍속에 의해서 장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장로교의 장로 직분이 확정되기 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장로 직분은 종교개혁 때에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로들을 불렀다는 것은 곧 교회의 어른들을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언과도 같이“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교회를 맡아서 인도해야 되겠소” 하면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설교하게 되는데, 저들이 일반 교인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갖춘 설교입니다. 중요한 마지막 행사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내용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8절에 보면“…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로만 증거한 사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행위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시간에 “너희가 다 아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3년 동안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항상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항상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요, 행위로 저들에게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 자세를 행20:19-20上절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든 겸손과” 모든 일에서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하기가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뭐 좀 있으면 그거 자랑하고 싶고, 뭐 좀 알면 말하고 싶고, 겸손이 아주 힘든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겸손,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내가 얼마나 겸손했는지 너희가 알지 않느냐 합니다.
다음은 “눈물”이라 합니다. 이것은 그 애정을 엿보게 합니다. 동정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볼 때에 눈물이 있었어요. 또 죄인들을 볼 때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에 안타까워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어요. 오늘날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다 말라버린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정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 복음을 미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볼 때에 눈물을 흘렸어요.
셋째,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라 합니다. 참고, 인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내에 대한 철학은 이렇습니다. 위대함의 바로미터는 인내입니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 그는 인내에 대한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권을 무시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권세가 없다, 자격도 없다하고 비난하매, 사도바울이 이에 관하여 답변을 하는데, 첫 마디가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 대하여 사도가 아니냐, 내가 너희들을 참지 않았느냐, 참는 것을 보면 내가 사도가 아니냐, 사도의 표 중의 하나는 참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간계, 많은 시험에 잘 참는 것을 너희들이 보지 않았느냐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넷째는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꺼리더냐, 내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하더냐, 하나님을 보고 말했지요.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하고 거리끼는 것 없어요. 겸손과 눈물, 그리고 인내와 용기, 이것을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 모르는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3년 동안 같이 한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전파 방법에 대해서는 20下절에 “전하고, 가르치고, 동거했다”고 말씀합니다. 때로는 전파합니다. 때로는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생활을 통해서 직접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문 21절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것이 그 메시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회개라는 말은‘메타노니아’로‘뒤로 돌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돈다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으로 가던 사람이 뒤로 돌아서 하나님께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입니다. 뉘우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세상적인 것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고,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하나님께 대한 회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그가 전한 메세지를 딱 한 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22절 이하의 말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재적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매인다는 말은 포로된다, 혹은 붙들린다”는 말입니다. 문제는“심령”입니다. “프뉴마”-“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은 인간의 영이나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표준 번역에는 성령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령에 매임을 받다”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많은 사람이 택합니다.
성령께 매였다고 말함은, 성령께 포로 되어 붙들렸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강력한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감동하는 것, 이런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사적인 것입니다. 평상시의 성령 충만이 아닌 이것은 비상한, 은사적인 특별한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영인데 아시아에서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하려고 하나 말이 안 되고, 말을 할 수 없고, 마음이 불안하고-곧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니아로 건너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이야기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마는, 우리는 다 성령을 모신 존재이기 때문에, 가끔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때로는 우리가 심령에 매임을 받는 수가 있어요. 그 길을 가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해요 제가 신학하기 전에 평안이 없고, 내 갈 길이 아니다 항상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하고 나서 그 마음이 없어 졌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가져요. 사도바울이 스스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안 갈 수가 없어요. 피할 수가 없어요. 가면 죽을 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돼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꼭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점치는 영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성령 충만 받으면 어디 가서 무얼 하고, 누구와 결혼하고 …. 별 소리 다 합니다마는 그것은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바울이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갈 뿐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른다고 했어요. 성령을 받아 가지고 점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주님 말씀을 보니까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알 수 있어요. 23, 24절에 “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미 하나님께 헌신해 버렸어요. 무슨 일을 만나도 상관이 없어요. 살든지 죽든지 상관이 없어요. 예루살렘으로 갈 것입니다. 달려 갈 길을 가려한다고 경주자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경주자가 될 때에는 목표를 향해서 뛰는 것입니다. 온 정력을 다 해서 뛰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요. 주저할 것도 없어요. 이것은 사명에 사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삶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소유하는 양식이요, 또 하나는 존재의 양식이다”라고. 소유의 양식이란? 물질을 얻고, 권세를 얻고, 명예를 얻고, 얻으려 얻으려 얻으려 하다가 아무 것도 못 얻고 죽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의 양식은, 의미를 생각하고, 목적을 생각하고, 사명에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명에 충성했느냐 입니다. 사명을 위해서 삽니다. 왜요? 사명이 내 생애, 생명보다 중요하니까요. 죽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목숨 아무 것도 아니다. 죽어도 좋다. 순교 정신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에 났으니까요. 나는 이것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니까요. 이것 전하고, 어디서 어떻게 끝나도 상관이 없어요. 다시 말하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 2:17, 18 절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합니다. 피를 쏟아 붓는 다해도 나는 기뻐하리라 합니다. 살고 죽고, 편안하고 편안하지 않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다만 내게 맡긴 사명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이 내 생명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의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모름지기 이런 생을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존재의 양식으로 사는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