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12ㅣ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중 에베소전도가 절정기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에서 3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여러 편의 편지도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에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던 먼 곳에 가서 권면하고,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사도바울의 마지막 전도여행이라고 하는 심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울의 생애에서 마지막 여행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 마치 유언할 때와 같이 아주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귀한 말씀을 전하면서 순방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교회를 한 번 세워놓고 누구에게나 맡기고 그냥 돌아선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 대하여 두 가지로 배려했습니다. 하나는, 그 교회를 가서 순방했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을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 후속 결과가 아름답게 되도록 계속적으로 마음과 정성과 기도와 권면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이 마음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 놓고는‘하나님께 맡깁니다.’ 하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으로 시작했으면 이제는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고, 염려하고, 권면하고, 협력하고, 돌아볼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의무와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방임적이고 무관심한 사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이미 세운 교회는 종종 다시 돌아보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 2절을 보면,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라고 간단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근 1년 동안에 된 이야기입니다. 또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또한 믿음이 굳게 서도록 가르치고자 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3절에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함으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이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는데 바울에게 적대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음모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때가 유월절이 가까왔기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지금 예루살렘에 유월절 순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를 타게 되면, 그 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게 될 것이고, 그들 가운데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함께 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를 타지 않고 좀 더 기다렸다가 떠나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과 핍박을 이기면서 일생동안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순탄하게 무사하게 모든 일이 된 것만은 아니에요.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특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 사람들의 끈질긴 협박이 그를 어지간히도 괴롭혔다는 것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4~6절에“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브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여러 일행들과 함께 동행을 합니다.
선교여행 처음에 그는 바나바와 함께 다녔고, 다음에는 실라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디모데, 또 그 다음에는 누가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바울은 여러 사람과 함께 합니다. 하나의 전도군단이었습니다. 그들과 잠시 헤어졌다 만났다 합니다. 거의 그는 혼자 전도여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꼭 수행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독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또 선교는 자기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협력을 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협력할 줄도 알고, 협력을 구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줄도 알고,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에요. 지금 우리교회 목회자 세미나도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서로 도와 은혜 가운데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여행을 혼자 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협력을 구하면서 협동하여 선을 이루는 데에, 그의 인간됨과 전도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7~9절에“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한 청년 유두고가 3층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떨어져 의사 누가가 보니 죽었습니다. 이것은 드로아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 상황을 살펴보면, 바울이 드로아에서 꼭 1주일동안 유하고 이제 내일 아침에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시간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안식 후 첫날(7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날은 곧 주일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면, 안식일 다음 날 주일날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던 풍속이 벌써 주일 지키는 날로 바뀌고 있습니다. 왜 토요일인 안식일을 다음날인 주일을 택했느냐? - 유대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을 생명같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바꾸어서 주일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주일날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 날인 주일날은 꼭 모여야 했습니다. 어느 사이에 유대인들의 안식일의 풍속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고는 이 엄청난 사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니, 안식 후 첫 날에 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결국은 주일날로 지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7절)” - 이것은 애찬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동식사를 말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성찬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성찬예식을 행한 것입니다.
다음에“이튿날 떠나고자 하여(7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그날의 집회가 송별회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뜻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오늘 설교를 하고 나는 떠날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을 줄 압니다. 행전 20:38에 보면“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드로아에서 이 말을 했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아주 심각한 시간입니다. 단순한 송별회가 아니라, 바울의 입장에서는 유언을 한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씀을 남기는 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하면서 한 마디 한 마디를 아주 신중하게 유언처럼 말씀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은 그렇게 듣지 못했다는 것이에요.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이시간 여기에 나왔지마는, 김 목사의 마지막 설교라면 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겠습니까? 이래도 졸겠습니까?
또한, 본문에“강론할새(7절)”라고 말씀합니다. 설교가 조금 길어졌어요. 어쨌든 마지막 시간이니까 좀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아주 심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정신 차려 듣지 못했다는 것이에요.
또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8절)” - 환하게 등불을 켜 놓고 밤늦게까지 사도바울은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유두고’라는 이름은 그 성격으로 보아 노예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두고는 하루 종일 시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쳤으니까 저녁에 졸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요. 뿐만 아니라,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았다가”라고 합니다. 아마 시중을 들고 맨 나중에 들어와 맨 뒤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졸았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첫째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어요.
바울이“자, 이제는 마지막 시간이다. 당신들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하는 내용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말씀에 심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 지금 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깊이 들어야 하는데 바로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배시간에 서론부터 결론까지 말씀을 제대로 다 들어야 합니다. 빼 놓을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졸다가‘결론만 들으면 되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똑똑한 척하고 서론만 듣고‘알았어. 다 알았어’합니다. 또‘중간에 몇 마디만 듣고 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졸아요. 문맥이 이어지지 않으니까 심취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름지기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야 되는 것이에요. 대개 가만히 보면 결론만 들으려 하는 사람이 졸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튼 유두고는 말씀에 심취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피곤은 문제입니다. 정말 피곤하면 졸음이 심하게 올 때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어렵습니다. 본문의 유두고도 노예로서 하루 종일 일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깊이 졸더니(9절)”,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9절)”라고 합니다. 말씀에 이런 흔적이 있어요.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꼬집어도 보고,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그런데 졸음을 이기는 방법을 잘못 택했어요. 졸리거든 일어나 뒤로 가서 서서 들었으면 될 텐데, 바람을 쐬면서 좀 시원하게 있겠다고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진 것이에요. 졸음을 좀 이겨보려고 한 모양인데, 결국 이것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어요. 또, 몸이 걸터앉았지만, 사실 마음도 걸터앉은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우리 몸이 여기에 있듯이 우리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눈도 있으면서, 집중적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몸은 여기에 앉아가지고, 집 생각했다가, 직장 생각했다가, 오늘 있었던 일 생각했다가 … 이렇게 생각이 흩어지면 졸게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유두고는 집중하지 못했어요. 생각이 어지러웠어요. 그렇게 되면 졸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옛날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송 창근 목사님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분입니다. 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많은 명사가 나왔습니다. 또 장로님 가운데도 사회학적으로 지위가 높고, 상당히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송 목사님이 어느 말 설교를 하면서 보니까 사회적으로 아주 저명한 아무개 장로님이 꾸벅 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송 목사님이 당장에 말했습니다. “장로님, 일어나 밖으로 나가 예배당 3 바퀴만 돌고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장로님, 벌떡 정신 차려 일어나 가지고 군소리 없이 나가서 정말 예배당을 3 바퀴 돌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목사님도 대단하고 장로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존다는 것 참 맹랑한 것입니다.
더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한 장로님이 꾸벅꾸벅 좁니다. 그래 목사님이 “장로님,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물어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이 대답하기를 “우편국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우체국을 우편국이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엉겁결에 우편국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여러분 졸다 보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유두고 같은 사람아 되어서는 안 됩니다. 피곤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졸릴 수 있는 상황입니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졸렸겠습니까?
오늘 본분은 유듀고가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9절 하반 절에“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의사인 누가가 들여다보니 죽었다고 했습니다. 10-12절“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그러데 놀라운 일인즉, 바울이 딱 가서 보고 기도하더니 유두고는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두고의 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습니다. 구약 엘리사가 수넵 여인의 죽은 아들 위에 올라 엎드려, 그의 눈과 손과 입과 몸에, 자신의 눈과 손과 입을 대었던 것과(왕상 4:34, 35)유사합니다. 바울의 이런 행동은 사랑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신의 몸 전체를 유두고에게 내어 주어 그를 살리고 자기가 죽겠다는 대속의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와 함께 바울은 사람들에게“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사인 누가가 이미 죽었다고 판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그가 몸을 안는 순간에 유두고의 생명이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믿음의 능력의 역사와 함께 살리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드로아 교인들은 살아 낸 유두고를 보고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두고가 막 죽었다고 떠들고 야단들이었지만, 바울은 오히려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긍정적으로 확신 있는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보이는 살아있는 믿음, 즉 마음에 믿고 입술로 시인하여 행위로 옮기는 것이 참 살아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성령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신앙체험과 간증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조는 교인도 있고, 조는 신앙도 있어요. 언젠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점 더 간절하게 말씀대로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다니던 시골교회는 강대상에 십자가 대신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누가 서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예배당 정면에 쓰여 있던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졸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됩니까? 졸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 하셨을 때에 기도했으면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오늘날도 문제가 있다면 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확실한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