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21~41 ㅣ김남수목사]
바울의 에베소 전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 또 마귀의 시험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빌립보에서와 같이(행16:19~24)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의 이권문제로 일어난 소요사건입니다. 복음이 흥왕하고 우상숭배가 쇠퇴하므로 데메드리오가 시민을 충동하여 일대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23~24절). 이번에도 고린도에서와 같이 서기장이 잘 무마해서 진압되었습니다(35~41절).
20, 21절에 보면“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를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로 보아야 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이 흥왕하자, 이 지역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몇 곳을 거쳐서 로마로 가고자 합니다. 로마 전도여행을 계획하고 경영하고자 하는 바로 그 시점에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큰 핍박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순경이든 역경이든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겸손하게 따라 행했던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벌써 로마에 가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간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터에 결국 떠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기로 해 에베소를 떠나게 되고 결국은 여러 곳을 거쳐서 로마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에“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여기서 도(道)란 기독교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이 그리스도의 교리’라는 말씀입니다.
적지 않은 소동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는, 쉽게 말하면 핍박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핍박이 있게 된 이유는
첫째, 복음이 흥왕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
주의 말씀이 능력이 있었고, 이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므로 복음의 역사가 흥왕했다는 것입니다.
크게 부흥했습니다. 때문에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도 생각해보면, 어느 한 구석에서 조그마한 소수의 집단의 행동이라면 핍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중심으로 한 번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저 갈릴리 시골 해변에서 몇 몇 사람이 모인 사건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고,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여든 수 십 만 명의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되니까, 사건이 커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30년 전에 우리 교회 치유 세미나도 조그마한 상가 교회에서 한 것이 아니라, 보수주의 복음의 본당인 영동교회 쳐들어가서 세미나를 개최했고, 목회자들이 한 기에 1,000여명이 전국 각지에서 왔기 때문에 교권 잡은 자들이 시기하여 우리 교단에 투서를 내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소수 집단으로 머물러 있으면 내버려 둘 수 있어요. 굳이 핍박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독교가 흥왕하고 부흥되었기 때문에 핍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면야 핍박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기독교를 전수하면서 예수님 믿어도 좋고, 불교 믿어도 좋고, 유교 믿어도 좋고, 조상 제사를 지내도 좋다 이런 식으로 얘기 했다고 합시다. 무슨 핍박이 있겠어요?
오늘날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신신학자들 가운데 다원론, 다원 종교라는 것이 있어요.
종교는 다 같은 것인데, 불교든, 유교든, 석가든, 마호메트를 따르든 저마다 좋을 대로 따르고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거지 어찌하여 기독교는 저희만 옳다고 다른 종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하느냐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별나다는 거지요. 종교적 대화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적 타협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라면 다른 종교는 종교가 아니에요.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이 있는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게 나타나고 있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그것은 사기 치는 것이다. 이렇게 몰아붙이니까 핍박이 없을 수가 없어요. 다른 종교도 인정해야 되는데, 인정 안 해요. 오직 기독교만이 그 많은 세월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낸 것입니다. 복음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력이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당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는 많은 박해 속에서 순교적 신앙을 지켜온 종교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기독교신앙, 성서적 신앙 외에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교리와 신앙에 있어서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새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원 종교니 뭐니 이상한 말을 합니다마는, 이것은 교회 안에 들어오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손으로 만든 것이 무슨 신이냐 – 절대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또 하나는 생명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누룩과 같아요. 지금 기독교인이 몇 사람 있는데, 거기에 머무르고만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핍박이 있겠습니까? 핍박을 해야 될 이유가 뭔고 하니, 그대로 놔두면 온통 기독교인이 될 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은 가만히 보면 그들 자신들이 기독교를 알고 있어요. 기독교라는 것을 놔두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서, 마침내는 공산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래 저래 핍박하려고 애쓰는 것은 기독교의 폭발적인 생명력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막을 수 없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어 온 세계가 다 복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핍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핍박하는 것은 생명력과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핍박이 없다면 그 사람은 멍청하게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합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손해 보게 되어 있어요. 핍박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바로 바른 신앙에 대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개인적으로 받은 경험을 보아도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버려야 될 것이 있어요.
옛 생각이나, 옛날 믿는 것이나, 옛 습관 등은 겸하여 버려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을 믿으려고 애쓰면서도 술친구가 있어요. 여전히 만나고 있어요. 그래가지고는 신앙생활이 바로 설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가까운 것이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라도,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이젠 냉정하게 끊어야 돼요. 이것이 없이는 안돼요. 여기에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믿으면서 우리는 얼마간의 손해를 보아야 해요. 이런 의미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라는 신이 있어요. 이 이름은 그리스의 이름입니다. 헬라 사람의 이름으로는 아데미이고, 라틴어로는‘다이아나’입니다. 아데미신의 신화나 족보를 살펴보면, 제우스신과 레토신 사이에 태어난 아폴로와 쌍둥이인 딸입니다. 아데미는 아폴로의 누이로 순결한 처녀신이요, 아폴로가 태양신인 것처럼 아데미는 달신이었습니다. 이 신전의 제사장들은 고자들이었고, 거기에 가장 천한 여성들과 노예들이 종사했고, 아데미의 예배에는 의식적인 매음행위가 따랐다고 합니다. 에베소의 수호신인 아데미의 오랜 위신이, 바울의 전도로 졸지에 떨어지고, 거기서 생계를 유지하던 아데미 상을 만들어 팔던 은장색들이 실직할 판이니, 이런 소요가 일어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아데미 신상을 작게 모형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신전에 와서 경배를 하고 돌아갈 때에 이 작은 신상을 사 가지고가 자기 집에 갖다 놓고 섬겼어요.
아데미 신의 모양 장사가 제법 짭짤하게 잘되었어요. 부르는 것이 값이었습니다.
은장색들이 신상 모양이며, 부적을 은으로 만들어 파는데‘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은장색의 회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은 대영박물관에 있는 고전문서에도 나옵니다. 데메드리오는 그만큼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밑에는 많은 은장색들이 있었고, 그 업으로 인해서 잘들 살았습니다.
24~28절에“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는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 풍족한 생활이 생업에 있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영업이 천하여 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 아데미여!!” 라고 백성들이 말합니다. 사실이 그랬는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장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연히 신상에 예배드리지도 않고, 물건을 사지도 않고 … 그러니까 장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돈이 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충동시켜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아데미 신의 명예를 떨어뜨린다, 신을 경홀히 여긴다의 이유로가 아니라,
문제는 돈이에요
또한 도덕성은 안중에 없어요.
자기들한테 돌아오는 이득만 생각했어요.
이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우매하고 어리석어지고 우상을 섬기면서 바보가 되는지, 백성에게 끼치는 좋지 못한 악영향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기네 돈 버는 것, 그거만 생각하다가 손해가 나게 되니까 소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하는 그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냉정함이 없었어요.
아무리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하는 말을 들을 때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만들고 있는 그들은 알고 있지 않나요? 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떠들고 있고, 그렇게도 부패한 사람들이 믿고, 절하고 경배 드리고, 제물을 드리고 있지마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만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있으니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찌해서 고집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냉정함을 찾아야지요. “맞아, 사람이 만든 것이지.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그것은 신이 아니지.” 이제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끝까지 신이라고 강변하고, 위엄이 어떻고, 능력이 어떻고, 권세가 어떻고, 쓸데없는 소리를 합니까? 이들을 가만히 보면 냉정함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말씀합니다. 저들도 다 듣고 있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 맞는 얘기이지요. 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맞는 얘기임을 압니다. 그러면 아무리 오랫동안 어리석은 일을 해 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해요.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소동을 일으켰어요.
32~42절까지 보면, 군중이라는 것은 그렇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모여 있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것입니다. 떠드는 것이니까 떠드는 거예요. 원래 군중이라는 것이 그런 데가 있습니다. 그 시간을 열심히 떠들고 했지마는 왜 모였는지, 왜 떠들었는지, 자신들도 몰랐다는 거예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렇게 소란을 떨다가, 마지막에, “서기장이 이럴 필요가 없지 않느냐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생각해 보라 이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에게도 보고를 해야 되는데, 로마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소동이 아니냐, 질서를 지켜야 한다. 이러다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인즉 이러지 말라.” 해서 흩어지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바울은 아무 말이 없어요.
본문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핍박을 받을 때에 침묵했다는 것입니다.
때리면 맞고, 끌어가면 끌려가고 – 그것뿐이에요. 사도 바울이 미안해서, 자기가 가만히 있으면 배신하는 거 같아서 오히려 연극장에 들어가려 했는데, 이를 말리는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31절).
어쨌든 이 분들은 말없이 겸손하게 핍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모니카」라는 여선교사가 중국 어느 마을에 가서 선교를 했는데, 그 마을에는 유달리 점쟁이가 많았습니다. 점쟁이들은 돈을 많이 벌다가, 선교사가 설교하면서 점은 가짜다, 사기 치는 것이다 하고 가르치니까 점쟁이들이 영업이 안 됐어요. 이 점쟁이들이 분노해가지고 감자를 가지고 오더니, 설교하고 있는 선교사를 향하여 집어 던졌어요. 돌로 때리면 되가 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렇게들 핍박을 했어요.
“양돼지는 너희 나라로 꺼져!” 하고 소리치면서 던졌습니다. 그 버려진 감자를 다 주워가지고 선교사는 머무르고 있던 집 마당에 심었어요. 그랬더니 이듬해에 감자가 많이 거두어졌어요. 이걸 모아가지고 선교사는 점쟁이네 집에 갔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던진 감자를 다 심었는데, 이렇게 많이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선교사의 얼굴이 너무나도 깨끗하고 티가 없어서 그 점쟁이들이 오히려 돌이켜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핍박을 당할 때에는 어떤 곤욕을 당하는지, 이유야 있건 없건 따질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로서 말미암았고, 또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게 이루어질 것이고, 이런 소동이 있으므로 해서 사실은 복음이 더 크게 전파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복음의 절대성도 나타나고, 그 참됨도 여기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바울과 그 일행이 초연했던 것처럼, 모든 핍박 속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을 초연하게 극복하고, 이기고, 참고, 견디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른 신앙을 찾아 가는 길에 반드시 핍박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억울함을 당한 일도 있고……. 그것은 부득이 그러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겸하여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믿을 때, 고난 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대가를 지불할 각오!! 십자가를 질 각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입니다(눅 9: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