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13-20 ㅣ김남수목사]
오늘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20절에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능력, 말씀의 권세-이런 것을 사건을 통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것만이 꼭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부로 느끼고, 피부로 부딪히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이것이 단순히 귀에는 들려지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지난 시간에 본 바와 같이 이적이 나타나면서 말씀이 전해지는 순간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면서 귀신이 내쫒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심지어는 이것이 크게 나타나면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해서 바울이 현장에 못 가더라도 바울의 손수건을 갖다 얹어도 낫더라 합니다. 그 앞치마를 갖다 얹어도 귀신이 나가더라 합니다. 이런 사건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지명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곧 주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저 지난 주에 말씀 드린 “주의 말씀을 듣더라(10절)”귀로 듣는 것은 바울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바울의 음성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들었어요. 이 말씀이 능력인 것입니다.
가장 큰 능력은 중생하는 능력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굳은 마음, 못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게 돌아와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것이 기적입니다. 가장 큰 이적은 한 심령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는 이적, 내적으로 영혼이 구원받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저러한 가시적 이적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 고침 받는 일, 귀신이 나간 일, 그 같은 희한한 능력이 바울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문제가 되는 것이 13절이하에 마술사들이었습니다. 마술사들이 가만히 생각해 본 즉은 “바울의 마술”이 저들의 마술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술이라고 하면 이것은 귀신 놀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재능을 가지고, 머리가 좀 더 잘 돌아가서 하는 재능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굉장하다”합니다. 알고도 속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 시대라 이런 속임수를 보고 이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술사들은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기 위해서 거창한 예식을 해요, 그래서 마술사들은 이상한 옷을 입어요.
그 옷을 입어야 꼭 마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속임을 하기 위해서 유달리 이상한 옷에, 이상한 모자에, 이상한 화장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눈속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주문이나 주술입니다. 중얼 중얼 모르는 소리로 무엇을 외웁니다. 이런 말을 하면 병이 낫고, 이런 말을 하면 병에 걸리고……. 이런 것을 주문 혹은 주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자기만이 아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 자기만이 아는 비방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마술행위를 하는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누가 더 큰 마술을 하느냐, 누가 더 굉장한 마술을 하느냐, 누가 더 속임수가 아닌 진짜 마술을 하느냐 – 이것을 진술이라고 합니다.
마술이 아닌 진술, 이런 희한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사들이 마술하는데, 전에 TV를 보니까 자기네들은 다 압니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는 것을 보니까, 이것은 진짜거든요. 귀신 내쫒는 것도 진짜요, 병 고치는 것도 진짜입니다. 모두들 “야 참 희한하다”합니다. 이 사람들의 시각으로서는 바울을 마술사로 보는 거예요. 일단 마술사로 보고 나면 여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 사람은 어떤 주문을 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슨 주술을 하고, 무슨 주문을 외웠기에 저렇게 희한한 능력이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바울이“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말했다면, 마술사들은 맞다 나사렛 예수라고 했으니까 귀신이 나갔구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 이 말을 주문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만 하면 귀신이 나갈게 아니냐. 합니다. 또 바울이 한 것처럼 손짓하고, 바울이 한 것처럼 소리도 지르고, 그러면 될 것 아니냐 합니다. 자기네들의 방법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저 행사와 저 의식과 저 주문이면 저런 능력이 나타난다고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들이 하는 것을 보세요. 13절에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를 명하노라” - 13절에 “바울이 전하는 그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안 나갔습니다.
분명히 예수의 이름으로 했는데 안 나갔어요.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했는데도, 귀신은 나가기는커녕 이렇게 대꾸까지 합니다.
15절에“예수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그리고는 마구 대들어 잡아 뜯었어요.
아예 저들이 얼마나 급했던지 상처를 입고, 옷도 홀랑 벗긴 채 도망을 갔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주의하세요.
예수님의 이름이 주문이나 주술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되게 센 귀신한테 걸렸던 것 같아요.
자, 이렇게 혼이 나고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퍼질 때에, 그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17절, 18절에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지금까지 본 일은 시원치 않는 마술사였는데, 이거야말로 “진짜구나”, “굉장하구나”하며 놀랐습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모든 것이 나타나는구나.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를 믿게 되고, 자복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잘못된 우상숭배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결과가 있었습니다.
19절에“또 마술을 행하는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합니다. 마술사들의 비방을 적은 책 – 주로 부적이나, 주술이나, 주문에 대한 것들인데 자기들 나름대로 연구하여 적어놓은 책들이 당시에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또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은 책을 만들려면 인쇄기로 찍어 내니까 다량으로 만들기가 쉽지만, 옛날에는 전부 손으로 일일이 썼습니다. 그러니 책 한 권이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자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런 책을 많이 모아놓고 불살랐다고 합니다. 불사른 책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합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많은 책을 불살랐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가짜다. 이것은 다 다시 믿을 것이 못된다. 다시는 이리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맹세이지요.
그 맹세와 함께 책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우상과 과거의 불신앙적인 과거 생활을 다 불태워버리고, 그리고 예수를 믿더라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과 이적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요, 바울은 고전 1장에서 “말씀은 곧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능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말씀이든, 설교 말씀이든, 우리는 말씀을 단순하게 감상적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마세요.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내 심령에 와 부딪히면서 내가 중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사람이 되고, 가치관이 변화되고, 말씀은 중생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하기에 중생하게 될 때,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때에 여기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속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외적 표시로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이 말씀하는바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분명히 빛이요, 분명히 능력이요, 권세이십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에는 환자가 누워 있을 수가 없어요. 환자를 보면 다 고치셨으니까요. 장님은 눈을 뜨게 했고 문둥이는 깨끗하게 했어요.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나가야만 했어요. 정말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가 없고, 악의 권세가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빛이 있다면 어두움은 그냥 물러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빛이요, 그의 권세요, 말씀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적은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에 대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영력이라는 것입니다. 힘이라고 하는 것이 뭔고 하니 power encounter – 힘의 대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에 힘이 아닌 것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 앞에는 비능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이 없어요. 이것이 힘의 원리입니다.
힘의 원리라는 것은 하나는 살고 하나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왕국에는 악의 세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큰 세력 속에 어두움의 권세가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이것이 말씀과 함께 역사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말씀을 힘으로 느낍니까?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 정말로 말씀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내 속사람이 화끈하게 중생하는 그 시간에는 흔히들“뜨거워진다” 라고들 말합니다. 뜨거워지는 그 순간에 병도 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그 말씀 앞에, 그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 정신병자가 있을 수 없고, 귀신들린 사람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함께하는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혹시라도 주문이나 주술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술적 힘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힘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막 9장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십니다. 제자들은 변화산 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산 밑에 있는 9 제자들은 며칠 전에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저마다 능력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면 참 재미 있을 뻔 했습니다. 어쨌든 9 제자가 무슨 일이든 안 해 보았겠습니까? 안드레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안 나갔어요.
가만있다가 빌립이 “나사렛 예수란 말을 붙여서는 안 되겠다”싶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또 안 나갔어요. 도마가“이것 잘못했어” 하고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는데 안 나갔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별소리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끝내 안 나갔어요. 결국 제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믿음이 없는 세대여”(막 9:19)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어서 귀신이 안 나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여쭙니다. 왜 우리는 못 고쳤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9:29)
이것이 자기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어제는 귀신을 쫒아냈다 할지라도, 간밤에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너희는 산 밑에서 잠이나 자고, 잡담만 하고 있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나사렛 예수…….’ 한다고 해서 그것이 될 일이냐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능력을 나타낼 수 없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지만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때 회개하고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치유가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것이 치유자의 능력이 아니고 주문의 능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문제는 이 능력의 목적이 주님의 말씀의 능력, 승리적인 능력을 증거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나타내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대해야 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럴 때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0절에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힘 있게 전파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씀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산된 결과였습니다. 복음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와 아시아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고 말씀 위에 굳게 서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참 믿음만이 이런 어두운 권세를 이길 수 있고, 말씀의 능력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