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9:8-12 l 김남수 목사]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간 전도하고, 유대인의 반대로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2 년간 전도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일생에서도 최대한의 정력을 기울인 역사로 에베소는 물론 아시아 일대에 그의 사역의 감화가 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사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8, 9절에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본 절은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간단하게 그 특징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이니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담력, 신앙적 용기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게 용기입니다. 그런데 그 용기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용기는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담대한 사람이 왜 나약해졌습니까? 그것은 자기 지식을 의지했기 때문이고, 자기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참되 용기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에만 의지할 때에, 사도 바울은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는 담력은 성령이 주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나약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해짐으로써 용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지마는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관계가 확실해지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과거가 완전히 해결됩니다. 과거에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갔던 사건이 문제가 안 됩니다. 십자가와 함께 과거의 문제가 다 해결되니까 용기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미래가 보장이 됩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고, 십자가를 통하여 저 먼 미래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담력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요.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요한 웨슬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일이 남아 있는데 내가 왜 죽느냐입니다. 대단한 얘기가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어느 때에 죽더라도 죽는 시간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바울은 여기서 용기를 얻고 담력을 얻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인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의 복음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로 바뀝니다. 마4:17에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씀과 똑같습니다. 하나님 나라, 즉 내가 전하는 복음의 사건과, 하나님 나라를 관계 맺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무어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개념 속에서 선교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교회를 위해서 섬기는 것… 이게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또, 그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만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 나라 개념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차원에서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재미있는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본문 8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전파한다고 되어 있지 않고, ‘강론’한다고 합니다. 또한 ‘권면’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때, 그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그저 ‘예수님을 믿으라.’하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포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해요. 전파하고, 그 다음에는 믿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이 없다 하고 도외시 할 수는 없어요.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권면하고 강론했습니다. ‘강론’은 요새 말로 하자면 ‘강의’한다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의하듯 뜻을 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권면’은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선포하고 듣거나 말거나 내 책임 다했다 하는 얘기가 아니라, 알아듣도록 권면은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누구에게 전도할 때 “주님 믿으세요.” “안 믿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선포는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선포적 의미도 있고, 강론적 의미도 있고, 설득적 의미도 있어요. 그래서 설교입니다. 선포만 있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선포가 없어도 안 돼요. 그러면서 설득할 책임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이 눈을 똑똑히 뜨고 쳐다봅니다마는 가령 그렇지 않고 졸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를 잘못해 가지고 자꾸 존다면, 비록 천사의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설교를 잘못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은혜란? 비몽사몽간에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졸지 않도록 얘기해야지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알아들어야지요.
알아듣도록 말을 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감동받도록 말해야지요. 강론하며 권면하되” - 우리가 전도할 때 선포도 해야 되고, 강론도 해야 되고, 이치에 맞도록 설명도 해야 되고, 그런가 하면 설득도 해야 됩니다. 무슨 재주를 써서라도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는 선포적이고, 강론적이고, 권면적인 데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강론도 하고, 설득도 하고, 설명도 하고, 알아듣도록 최선을 다해서 본문에 보는바와 같이 3개월 동안은 회당에서 애를 썼어요. 얼마간의 사람이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9절에 “마음이 굳어져 순종치 않고” 합니다. 알아들을 만큼 얘기하고, 설득도 했는데, 안 듣는 사람은 안 듣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낙심할 것 없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요. 마치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듯이, 안 듣는 사람은 안 듣는 것입니다. 안 듣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어요. 설교하는 중에 다 듣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안 듣는 사람이 있어요. 마음이 굳었어요. 이렇게 굳은 사람이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은 도리가 없어요. 예수님도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게 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하지 못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벌하지 못한다.”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약해져서 회개만 하면, 아무 때나 벌을 내리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사도바울이 3개월 동안을 회당에서 선포하고, 권면하고, 설득하고, 애를 썼는데도 마음이 굳어져 안 듣는 사람은 안 듣더라고 합니다. 안 듣는 것만이 아니에요, 순종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안 믿을 뿐 아니라 남도 못 믿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악질적이에요. 이런 사람은 어디에나 꼭 있어요. 자기도 안 믿고, 남도 못 믿게 해요.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꼭 있어요. 그런데 이제 보세요. 얼마간은 믿고, 얼마간은 안 믿더라하는 문제 앞에서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본문에 보면“바울이 그들을 떠나” - 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안 믿는 사람, 굳은 사람들과 믿으라고 하며 다투거나 싸우거나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 맡겼어요. 석 달 동안 최선을 다하고는 떠났어요. 주님께서도 복음을 듣지 않거나 배척하면 먼지를 털고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교회에서는 안 믿고 무리 양이 되지 못하면 떠나보내야 합니다. 전도는 내가 하되,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저 내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내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돌아서야지요. 그런 것을 붙들고 온 시간, 일평생을 다 보낸대서야 어떻게 되겠습니까? 닫힌 문은 닫힌 대로 두고, 열린 문으로 가야지요. 사도바울은 그래서 떠났습니다. 회당에서 떠났어요. 그리고 본문을 보니 두란노로 갑니다. 거기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9절에“제자들은 따로 세우고” 제자들은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놓아두고, 믿는 사람을 따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같이 섞어 놓아두면, 이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달립니다. 계속 시달리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쉬워요. 그래서 믿는 사람을 따로 떼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완악한 사람들과, 순진하게 새로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섞어 놓고, 이들을 다 구원하려고 애쓰면 안 됩니다.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유약한 사람이 유혹에 빠지게 되고 심령이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따로 떼어 놓았어요. 제자들을 분리시켰다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분리와 격리 - 여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완악한 사람, 비방하는 사람과 사귀지 마세요. ‘내가 저 사람 구원해야 되겠다’ 이런 소리하면서 자꾸 만나다가는 저도 마지막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요한2서에 보면, 이런 사람이 오면 문간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믿는 사람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분리시키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2년 동안 계속 하나님 나라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바울의 말을 듣더라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울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말씀을 듣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십니다.
내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바로 믿는 사람은 주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은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사람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말씀을 믿고, 주의 말씀으로 받는 그런 자세로 저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구원받고 주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주의 말씀을 듣더라” -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다음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사도 바울이 놀라운 능력을 행했어요.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에게 올려놓아도 낫더라” 합니다. 마귀도 떠나가더라 합니다. 바울이 손수 안수한 것도 아닌데 손수건만 얹어놓아도 낫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굉장하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이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적에 대해 의심하지 마세요. 성경에 있으니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적은 있습니다. 죽는 사람이 날아나고, 이적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 증거요, 그 표적으로 이적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계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이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바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이적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적이 없다면 주님을 믿지 아니하여도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적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이적이 확실해요. 그런고로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적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합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고용해서 역사하십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누구를 통해서든지 역사하십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용해서 쓰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여러분이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다른 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적 행하는 사람을 특별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충성된 일군이요, 겸손한 일군이요,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 행하는 사람을 너무 높이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 기도 응답 받아가지고 이적을 행했다고 교만하지도 마십시오. 그렇다면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하나님께서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병에 걸렸거나 나아도 그래요. 의사를 통해서 수술도 받고 약을 먹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어요.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 내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의사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울을 단지 고용한 일 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적과 함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새롭게 무릎을 꿇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고용된 사람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신 것뿐입니다. 이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 겸손하게 이적을 수용하고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고, 이적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고용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받은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오늘도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큰 이적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이적을 믿으시고, 하나님께서 고용하시어 이적을 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