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8:12-23 ㅣ김남수목사]
오늘 본문에 바울이 특별히 서원하는 바가 있어 고린도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선교는 아주 난산이었습니다. 문제는 핍박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심약해져서 상당히 어려운 가운데서 1년 반 동안이나 유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2-17절의 내용은 1년 반이지나 고린도를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갈리오라」는 사람이 이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 모든 나라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를 포함한 아가야 전 지방을 관장하는 총독으로 갈리오라는 사람이 부임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총독으로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하고 나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항상 바울을 괴롭혔는데, 결정적인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갈리오가 총독으로 부임하자 이를 계기로 해서 이제는 바울을 고소해서 가능하면 없애버리고자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갈리오가 왜 이렇게 이용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갈리오는 로마 네로 황제의 스승인 철학자 「세네카」의 형입니다. 세네카는 말하기를 ‘우리 형님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갈리오는 인품이 온화하고 많은 사람으로 부터 존경을 받는 학자이자 원로원의 회원이었습니다. 주후 51년 6월에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됩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 왔는데 유대사람들은 그의 인품을 알고 그 점을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들은 갈리오가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간교합니까? 로마 총독은 재판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고,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사람하나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이 로마 총독입니다. 유대인들은 갈리오라는 착한 사람을 이용해서 바울을 제거해 버리려 했습니다. 로마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바울을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로마 총독을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때로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이용해서 악한 계책을 꾸미는 일이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대사람은 유대가 로마 식민지이기 때문에 로마 사람을 철저히 미워합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세금을 로마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빌라도를 이용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마치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계책을 꾸며서 빌라도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나 악한 사람이 취하는 방법은 그와 비슷합니다. 악의 수단이 꼭 같습니다. 착한 사람을 이용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리오가 오는 것을 계기로 해서 이 착한 사람을 통해 바울을 없애고자 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니 고소당한 바울이 죄를 기각하고 맙니다. 죄목이 이렇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니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라고 하니, 유대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로마사람이 볼 때에는 이 무슨 중요한 일입니까? 율법이니 뭐니...는 로마인에게는 전혀 흥밋거리가 못 되었습니다. 전혀 죄목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마 총독으로서도 관심거리가 못 됩니다. 그래서 갈리오는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14절에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 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라고 합니다. 악한 일도 아니요, 부정한 일도 아니라면, 그리고 언어와 명칭 즉 문화에 관한 것이요, 종교에 관한 것이라면 나와 관계하지 마라. 나와는 상관이 없다.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 하고 내버려 둡니다. 기각한 다음에, 갈리오는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저희를 재판자리에서 쫓아냅니다. 그러자 17절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를 상관치 아니 하니라" 합니다. 회장당「소스데네」를 현장에서 때렸습니다. 일종의 분풀이입니다.정말 때리고 싶은 것은 바울입니다. 그러나 무죄선언을 한 이 마당에 바울을 때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로마법이 일단 바울을 보호하는 것이 됩니다. 죄 없는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소스데네」를 때렸느냐입니다. 추리해보면, 첫째는 바울을 고소한 사람이 「소스데네」가 장본인인데 바울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 틀림없이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군중이 데모하듯이 소리 지르면서 끌고 왔는데, 막상 기각이 되고 나니까 끌고 온 사람들이 격분한 나머지 왜 우리들을 동원했느냐 하면서 분풀이로 때린 것이라고 추리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소스데네」가 회당에서 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크리스천이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스데네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바울을 변명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갈리오 총독 앞에서 군중들이 소스데네를 쳤는데, 갈리오가 말리지 않았습니다. 소스데네는 그대로 매를 맞았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군중의 분풀이입니다. 요새도 그렇지 않습니까? 데모하는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버스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것도 나라 재산인데 분풀이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성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서 군중 심리라는 게 무서운 것입니다. 좀 냉정해야 됩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이게 되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걷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오늘 본문 18절을 보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다시 기록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을 따라 나섭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갈 때에 저들은 따라 갑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앞으로 로마로 간다는 말을 듣고 먼저 로마로 갑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선교하고 있을 때에 아마도 심부름을 갔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부부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평생을 바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생각을 합니다. 혹은, "교회를 사랑한다.“ 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는 일의 구체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해요. 자녀 사랑할 때도 어떻게 해야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때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대개 괴롭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지만, 그것도 지나쳐서 기가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뭐냐? 사도바울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자비량하면서 천막 짓는 일을 하면서, 밥을 벌어먹어 가면서, 전도하는 것을 보았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저들은 밥은 내가 벌겠소. 당신은 전도만 하셔요.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디를 가나 사도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경제적인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여러 가지로 도왔습니다마는 요새말로 하면 우선 경제적인 후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게 하므로 바울로 하여금 전도만 열심히 하도록 했고, 그것이 바로 자기들의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평신도입니다. 평생 장사하는 분들, 내 생각 같아서는 장사해서 돈 벌어 전도하는 분들을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걱정하지 않고 선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50, 60이 되었는데도 신학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전공과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50, 60되어가지고 그제야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나서면 되겠습니까? 피아노는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닙니다. 안 그래요? 돋보기안경을 쓰고 의학공부해서 수술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학공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50, 60이 되어가지고 신학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신학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나는 신학을 공부해서 나는 평신도로 일하겠다고 하면은 그것을 좋겠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제할 짓 다하고, 이제 와서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끝물에 와서 시원치 않는 기억력 가지고 , 하나님의 사업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할일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요?
장사하는 사람은 돈 많이 버세요. 열심히 정직하게 돈 많이 벌어서 선교하는 사람을 도우세요. "이제부터 돈 걱정하지 말고 일 하십시오" - 이런 의미에서 열심히 도우세요. 돈 걱정은 일절하지 말고 복음만 열심히 전하세요. 돈은 내가 대겠소. - 이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마음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까지 정했어요.― 사도 바울 이 사람을 평생 따라다니면서 일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요, 이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확실했습니다. 분명하게 자기 길을 찾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하루 종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명상해 보세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6:4에서 말씀합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그들은 자기 목숨이라도 바울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사랑했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이사를 하면서, 옮겨 다니면서 전적으로 바울을 도왔습니다. 아마도 고린도 선교이후에는 바울이 다시 자비량하고 전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도왔으니까요.
그다음에 오늘 본문 18절에 보니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고 말씀합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왜 머리를 깎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원이 있으므로" -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가끔 삭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원한이 있 때에 머리를 밉니다.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원한 관계가 있거나 한이 맺혀 있을 때에, 원통함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상당히 부정적인 면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히브리인들의 문화는 오히려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려 주셨구나. 꼭 죽은 사람인 나를 구해 주셨구나. 그렇게 감격스러울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왜요?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나를 위해서 살았지마는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서만 살겠다" 하는 마치 나실인과 같은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감사, 나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특별한 감격, 그리고 이미 죽은 몸이라 생각할 때에 이제는 나를 위해서는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니 이제부터 사는 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정도의 결심이 있을 때에 머리를 깎습니다. 또 한 가지는 서원이 있기에 머리를 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기로, 감사하기로, 앞으로 이런 일이 있든 저런 일이 있던 개의치 않습니다. 아마도 사도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너무 핍박이 많았어요.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보호해 주시지 않고, 어디서 어떻게 끝난다하더라도,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서 죽든지 로마에 가서 죽든지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서원 기간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인들은 8일간이나 30일간, 혹은 일평생의 기간을 두고 그 기간이 끝나면 번제를 드리고, 그때에 자른 머리카락도 번제와 함께 태운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입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죽고 사는 것도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 머리를 깎는 것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순교를 선택했습니다.
이제는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 어디서, 어떻게 끝나더라도, 그대로 주님 앞에 가기로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순교를 선택하는 서원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에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 왜「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그 자리에 다 머무르게 했을까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또 핍박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으면 소스데네처럼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여기에 계시요. 혼자 들어가서 전도 하겠소 하는 배려였던 것입니다. 핍박이 있으면 나 혼자 당하겠소. 하는 배렸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지도자 된 미덕입니다. 나는 앞에서 순교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들은 여기 머물러 있어 수난을 피하세요. ― 아름다운 마음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시 만날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 모르는 것이니 만일에 이번에 순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한다면, 한마디로 살아남는다면 다시 돌아와서 만나게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나를 불러서 순교하게 하는 것이라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요, 내 각오는 이미 서 있습니다. ― 이런 얘기입니다. 흔히 곧잘‘주의 뜻이라면’ ‘주의 뜻대로’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끔 보면 잘 되는 일에는‘주의 뜻대로’하고 안 되는 일에는 ‘아니요’합니다. 여러분‘주의 뜻이면’하는 말은 순교의 각오를 내포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만날 것이고, 주께서 나를 순교하도록 부르신다면 그대로 갈 것입니다. - 얼마나 깨끗하고 결의에 찬 마음입니까? 얼마나 여유 있는 마음입니까? 생명문제까지 깨끗이 해결하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 같은 모습이야 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