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9 ㅣ김남수목사]
마케도냐 둘째 전도지는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지리적으로 유리했으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보낸 곳으로 특히 중요시됩니다. 이런 서신들과 사도행전 오늘 본문을 대조하여 볼 때, 바울의 전도사항을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는 동안 살후3:8을 보면 손수 일하면서 전도하였는데, 궁핍을 느낀 모양으로 이를 위해 빌립보에서 두 번 물질을 보내 주었습니다.(빌4:6) 바울이 힘써 전도한 결과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본문에는 이방인이 많이 믿게 된 것과 아울러 유대인의 방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두 성을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는데 1절에“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고 합니다. 이 길은 150km가 넘는 먼 길로 옛날에는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어쨌든 먼 길을 걸어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적게 살아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강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어 루디아와 그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2절은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자기 관례”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관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 에이오토스’라고 하는데 “습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습관대로”입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습관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보는 사람, 성경을 읽는 사람, 기도를 하는 사람 등 저마다 무엇인가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습관입니다. 꼭 그러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그렇게 살아서 습관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관례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습관이냐 아니면, 잘못된 습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습관 그대로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일생동안 그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그 습관을 못 고칩니다. 그 습관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못 고치고 그것에 끌려가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정말로 철저한 이방의 사도였다고 생각됩니다.
본문 2~3절을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를 보면 사도바울의 습관 4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안식일이 되면 만세를 제쳐 놓습니다. 바울이 지금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유대 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안식일을 지킵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대한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아무리 먼 고된 여행을 하고 다니면서도 꼭 안식일을 지킵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주일은 꼭 지키는 것입니다. 만사를 제쳐 놓고 주일은 엄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 가노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아무리 부부싸움을 했더라도 주일날은 꼭 같이 교회에 나오세요.”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일날은 꼭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세요.”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입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습관,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둘째는 사도바울 어디서나 회당을 찾았습니다. 회당에 들어갔다 - 그러니까 교회에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이 없을 때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즉 장소를 옮겨 강가에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바울에게는 주일을 이렇게 엄격하게 지키는 나름대로의 관례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회당에 들어가면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입니다. 회당이 열려 있으면, 저들의 회당에서는 성경을 일단 읽은 다음에 “누군가가 이에 대하여 말할 사람이 있으면 말하세요.”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바울은 그때마다 일어서서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성경학자로서의 본분을 다 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성경을 강론하는 이것이 바울이 자기 관례였습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풀어서 “예수가 바로 메시야, 그리스도다.”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관례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습관이었습니다. 자신의 습관이 되어서 어디가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관례를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자기 습관은 어떻게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4절에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니” 라고 말씀합니다. 헬라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을 따랐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귀부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Leading woman", 즉 지도급의 여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아주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방에 가서 살고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로마 귀족들은 유대 여성들과, 후대에 와서는 기독교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인, 로마인 여성들의 생활이 너무도 음란 방탕하기 때문에 성병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좋은 자녀 깨끗한 자녀를 얻으려면 아내인 여자가 깨끗해야 하므로 로마 귀족들은 유대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로마의 클레오파트라니 뭐니 하는 여인들, 다 시원치 않는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좀 생각하는 로마 지성인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이나 귀족들은 가능한 한 유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로 이 부인들이 회당에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는 자유와 자기 종교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귀부인은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신문을 가진 사람들의 부인들입니다. 지금은 이방 사람하고 살고 있지만 그 본색은 어디까지나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나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사도바울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또,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에, 많은 로마 귀족들이 기독교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기독교인으로 키웁니다. 바로 그 자녀들이 자라서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이바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사도바울의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바울의 데살로니가 선교여행은 성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믿고, 귀부인들이 믿고, - 아주 사역이 잘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가 잘 되고 보니 시련이 따릅니다. 5절에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바로 유대인들이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그대로 말합니다마는 잘 들어보세요. 유대인 일반인 다 그랬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어요. 회당에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도 개종을 해서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됨으로 인해서 자기의 위신과 위상이 무너진 무리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하면, 이들이 바로 유대교에 속해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 지도자들의 소위 인기가 떨어진 것입니다.
인기가 떨어지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활이 그만 다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지마는 사실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의 지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시기합니다. 야고보 사도는“시기”에 관하여 약3:14-15 절에“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헬라 원문의“시기”는 “젤로산테스”인데“시기하고 질투했다”는 말로 번역됩니다. 생명력이 없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을 읽고 형식적인 것만 가지고 예배를 드렸는데, 이제 바울이 와서 생명력 있는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모두 바울의 말을 듣고 믿게 됩니다. 또, 메시야가 온다고 기다린다고만 했는데, 바울은 바로 그분이 오셨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의 강력한 이 성경적인 논증에 설득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대 저들이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시기 질투해서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에릭슨」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시기의 근본원인’이 열등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왜 시기했느냐? -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까 결국은 열등의식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층의 사람을 만나는데, 가장 어려운 상대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 어렵습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립니다. 그런데 가장 상대하기 편한 사람은 열등의식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보다 잘 된 사람을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심리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를 부정해버리고 예수를 믿어야 하겠는데 예수만 믿는다고 따라 다니지만, 아직도 “자기”라고 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지 못해요. 그러면 여전히 신앙에 문제가 있고, 은혜가 없고,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쫓으라 하셨는데, 자기 부인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럴 때 평화가 없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 “시기의 악마의 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 리비아 사막을 지나는 한 수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졸개들이 이 사람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수도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금덩이를 보여주어도 요지부동입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다 시험을 했는데 영통하지 않습니다. 수도사는 여전히 당당히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실패한 마귀 졸개들이 좌절하고 있을 때 마귀대장이 이 꼴을 보고 “자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좀 봐라.”하고 나섭니다. 그 수도사의 귀에 딱 한마디를 속삭였습니다. 궁금한 졸개 마귀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대장님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뭘, 뭐라고 해? 간단하지, 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 주교가 됐다고 말했지 뭘.” 그 한마디에 수도사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동생과 형 사이에도 이렇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열등의식, 시기, 질투, … 이것을 완전히 버려야만 신앙생활도 바로 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이 시기, 질투로 인해서 엄청난 큰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한번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결국은 이성도 없고, 믿음도 없고, 자기들이 소중히 여기는 율법도 없습니다. 다 팽개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시기로 인한 악만 남았어요.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회당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세요. 사도바울을 가리켜 6절에“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하는 소란을 떱니다. 어떻게 하든 바울과 실라, 이 사람들을 내치고 죽이겠다는 생각뿐이지 바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자세히 들어보고, 또 사람들이 그를 따르면‘왜 따를까’를 좀 생각할 줄 알아 야지요. 그러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시기 질투에 사로잡히고 말 때에 앞뒤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말씀은 한 마디도 들으려고 하지 안 해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아요. 덮어 놓고“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하고 있습니다. 이게 마음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 문이 닫혔습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 그들이“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종교인들이 깡패를 동원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깡패를 동원했습니다. 소위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애초부터 율법을 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량배를 동원해 가지고 소란을 떫었다는 것 자체가 회당의 지도자로서는 못할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또 소동을 떱니다. 소동을 떨어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까?
또한 오늘의 본문은 보니, 사실은 사도바울을 잡으려고 했는데 바울을 못 잡으니까 6절에“야손을 잡아”읍장들에게 끌고 갑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야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이렇듯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바울을 잡으려다 못 잡으니까 그 집에 머물렀던 야손과 그 일행 그 집안 식구들을 끌고 와서 소란을 피웠다 이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가득한 이들이 목적을 달성위해서 하는 말을 좀 들어보세요. 유대는 로마속국이므로 유대 사람은 로마 사람하고는 원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절을 보면“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합니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가이사에게 충성했습니까? 이중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빌라도에게“만일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저들은 말했다. 아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리지 않습니까?
오늘도 보니 가이사를 운운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본심은 로마황제 가이사를 이렇게 호칭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마치 가이사의 충신이 된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9절에“보석금을 받고 놓으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이라면 보석금으로 놓아 줄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 또 한 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을 볼 때에,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유대 사람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율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거역한다고 자기들이 지금 정죄하면서 사실은 자기네들 스스로 철저하게 율법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시작부터 그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성이 바로 이런 핍박 가운데 세워졌으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훌륭한 교회요, 질적으로 아주 우수한 교회라고 사도바울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자기 관례,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활관례와 생활습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 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 말입니다. 또 그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시기와 질투가 우리 마음에서 끓어오를 때에 자기도 모르게 엄청나게 무서운 죄를 짓게 되고 악한 사람이 되고, 나아가서는 사단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이런 것만 죄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빼버리지 못한 시기, 질투, 열등의식, 자기라고 하는 것,… 이것을 완전히 빼 버리지 못하는 한 참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허구한 날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도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평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 잘못 발동하게 되면 악마가 따로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악마 노릇을 한 것처럼, 어느 사이에 우리도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회개하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시기 질투를 깨끗이 제어하도록“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결케 하소서”하고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