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16-40 ㅣ김남수목사]
주일 아침마다 사도행전을 강해해 왔었는데, 계속해서 이어 사도행전을 강해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제 2차 세계 전도 여행 때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의 지시대로 바다를 건너 유럽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서 먼저 루디아라고 하는 여 제자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고, 두 번째로는 귀신들린 여종 노예가 구원 받았고, 세 번째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수와 그의 집안이 구원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케도니아 전도는 바울에게 고난의 연속이었고, 고난 중에서도 전도의 열매를 거둔 지방입니다.
24절에“차꼬에 채웠다”는 말이 나오는데, 옛 우리나라에서는 두꺼운 널판을 길쭉하게 만들어서 죄인의 목이 들어 갈 만큼 구멍을 뚫어 가지고 거기에 죄인의 목을 끼워 고정시킨 형틀이 있었는데, 본문이 차꼬라고 하는 것은 구멍이 5개입니다. 널빤지에 뚫은 5개의 구멍에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을 끼우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를 이 차꼬에 채워서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점치는 귀신들인 여종이 있었는데, 그 주인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 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가 길을 지나갈 때 마다 따라 오면서 소리 지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합니다. 여러 날 이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귀신들린 여자이지 않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이건 정말 복음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심히 괴로워합니다. 그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여인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을 향하여 명령합니다. 그 즉시 귀신은 쫓겨나가도, 여종은 정신이 깨끗해져 치료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졌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 갑니다. 이 여종을 통하여 이제는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이익만 생각하고, 미친 사람 하나 온전케 된 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돈 벌 생각뿐인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21절에“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화적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바로 이해 못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의 장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풍속이나 문화의 문제가 장벽으로 가로막히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저들은 바울 등이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지 풍속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풍속이나 정치나 사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치의 문제로 돌립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이것이 핍박당하는 이유입니다. 북한 공산당도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는데, 기독교를 민주주의 앞잡이요, 미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기독교를 복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 무리가 소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선동화해서 군중 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바울을 죽여라!
실라를 죽여라! 하고 저들은 소란을 떨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상관들에게 끌고 가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치라 하여 매를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매를 맞을 때, 왜 때리느냐 얘기 좀 해보자 재판장을 만나자 하고 따질 만도 한데 그냥 매를 맞았습니다. 그저 온유하고 겸손한 가운데 매를 맞습니다. 그 이유는 조금 있다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기절했다가 밤중에야 깨어 난 것 같습니다. 밤중에 몸은 쑤시고 아픈데 그들은 그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25절에 기도하고 찬송을 할 때에 옥문이 흔들리면서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이 기도하는데, 생각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자기의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중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이런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를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감옥에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는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감옥 밖에 나가리라고 그런 기적을 결코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대가 있어서 찬송하고 기도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모습 이 형편대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이 같은 시련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도 미워할 것 없어요. 좌절할 것도 없어요.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빌립보 감옥이 열리는 기적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6절에 생각지도 않은 때에 홀연히 지진이 일어났어요. 옥 터가 흔들리고 철통같은 감옥소쇠문이 다 열렸습니다. 차꼬에 채워져 있었는데 그 차꼬가 저절로 다 풀리고 맙니다. 이 사건이 다 눈에 보이는 기적입니다.
확실히 큰 역사입니다. 그런데,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완악해진 마음이 녹아지면서 믿게 되는 것, 이렇게 한 사람이 중생하는 엄청난 기적에는 사람들이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난 기적, 감옥 문이 열리는 물리적인 기적, 이전에 오늘 이 감옥에도 조용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매 맞고 감옥에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지금 찬송을 부릅니다. 비록 깜깜한 감옥 속에 갇혀 있지마는 그 생각과 뜻과 영혼은 훨훨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몸은 상처로 아프지만 그의 마음은 기뻤어요. 모든 미움과 고통을 다 극복한 희한한 기적을 그 심령에서 먼저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 기쁨, 그런 감사, 그런 능력, 그런 영적 권세를 은사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매를 맞고도 하나님께 이 감사 기도와 찬송을 어떻게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큰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화) 어떤 부인의 남편이 꽤 잘라서 바람을 어지간히 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 부인은 독수공방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간암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들렀다가 그 내외가 붙들고 우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남편에 대한 생각이 어떻소?” “남편이 한참 바람피우고 다닐 때, 며칠 씩 독수공방할 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그랬더니 부인은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라 했지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과부되는 게 낫지, 했어요. 정말 이를 갈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랬던 것이 한스럽다고 했습니다. 죽어라 했더니, 정말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 급해진 것입니다. 그 때의 일이 생각난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소?”하고, 다시 물었더니 “한 달에 한 번만 들어와도 좋으니, 죽지만 말았으면 좋겠어요.”합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마음에 티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 미움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사도 바울 마음속에 먼저 이 같은 기적이 있었기에,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을 가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옥문이 열릴 때에 그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아니하려한 것입니다. 도망가지 않고 간수가 자결하려는 순간에 담대하게“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합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영적 자유인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얼씨구나 하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다 풀린 상태로 그냥 앉아있습니다. “여기 있느니라.” 얼마나 굉장합니까? 간수는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죄수를 책임진 사람은 죄수 한 사람만 도망가도 간수가 대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26절에“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하고 말씀합니다. 그랬더니 29절에“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참 굉장한 시간입니다. 보세요, 무서워 떨며 엎드렸다고 합니다. 놀라운 시간입니다. 무엇이 무서웠다는 것입니까? 죽음을 걱정한 것이 아니요 형벌을 무서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신령한 두려움입니다.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30절에“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여기서, 간수가 말하는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 큰 죄인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아주 단순한 본능적인 고백입니다. 이 때 바울을 통해 유명한 복음이 선포됩니다. 전도의 중요한 구원받는 요절말씀입니다. 31절에“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전도에 아주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바,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이 간수로 말하면, 지금까지는 로마 황제를 왕으로 섬겨왔다. 세상적으로는 로마 황제를 향하여 충성을 다하고 있지마는, 이제 생각을 바꾸라. 이제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왕으로 영접하고, 그를 왕으로 섬기라 는 뜻입니다. 간수는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전적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온 집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상처 난 자리를 다 씻어줍니다. 그리고 음식을 후하게 대접합니다.
마지막 대목이 참 은혜롭습니다. 33, 34절에 세례를 받은 다음에 온 집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기쁨은 돈을 얻은 기쁨이나, 권력을 얻은 세속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전에 체험하지 못한 절대적인 기쁨을 맛보았다는 말씀으로 마무리되는가 하면, 더욱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36절에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간수에게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간수가 나가라고 하니까 바울은 무슨 소리냐? 37절에“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왜 이제야“나는 로마 사람”이라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매를 안 맞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매를 안 맞기 위해서라면 때리기 전에 애초에“나는 로마사람이다.”라고 말했더라면, 매를 안 맞았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어디에 가나 구속되거나 매 맞거나 하지 아니하게끔 신분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때리려고 할 때에“삼가라 나는 로마사람이다”했더라면 안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 맞고 나서야“로마 시민을 이렇게 대우하느냐”합니다.
바울이 자기가 편하게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하나 그 이유는 근본 목적이 바로 그 순간 간수의 믿음을 확실하고 굳건하게 세우기 위함이요. 또 간수도 예수 믿게 하려함입니다. 그리고 세워 놓은 빌립보 교회가 튼튼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을 함부로 때렸도다. 하고 세속의 권세를 한 번 내세운 것 같습니다.
예화) 깡패 출신인 김 익두 목사님이 여름 어느 날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하도 더워서 웃옷을 벗어부치고 바람을 쐬는 중이었습니다. 저 만치 밑에서 술 취한 청년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올라옵니다. 이 청년이 김 익두 목사님 앞에 까지 와서는 목사님 보고는 다짜고짜“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 왔느냐”하고 한 방 먹였습니다. 술 취한 청년이 때리는데 맞을 수밖에요. 김 목사님은 한참 동안이나 잠자코 때리는 대로 맞았습니다. 청년은 상대가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재미가 없었던지 제 풀에 씩씩 거리면서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김 익두 목사님은 청년의 두 손을 마주잡고“형님 다 때렸소?”하면서 새삼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내가 김 익두야” 그제야 청년은 사색이 되어 살살 빕니다. 김 익두 하면 천하의 소문난 왕년의“유명한 주먹”이거든요. 목사님은 덧붙여“내가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너는 여기에다 묘를 쓰고 마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어서 니가 산거야. 그러니까 잘 들으라구,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니가 받았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이제 따라 와야지”
목사님은 청년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고, 그 청년은 찍 소리 못하고 따라갔다가 예수 믿게 되었고, 뒷날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다 맞아 놓고야 마지막 카드를 내어 놓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다 맞고 나서야 이제는 가십시오. 하니까, 아니다, “나 로마 시민이다”합니다. 멋있지요?
예화)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으로 돌아 가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많은 청년이 중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테일러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가려고 하나?” 청년은 대답합니다. “중국의 불쌍한 사람들 내가 가서 건져야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야지요. 그 무식한 사람들, 내가 가서 가르치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그 마음도 참 좋은 마음이요.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그 어려운 고통을 견디어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합니다. 청년은“그러면 당신은 무슨 마음으로 선교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저요? 간단하지요, 나는 중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것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 간수를 사랑했어요. 빌립보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그런고로 그 같은 능력이 있었고, 그 같은 권세가 있었고, 그 같은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세속적인 모든 권세를 다 극복한 영적 권세로 거두는 놀라운 승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놀라운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