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4:11-28 ㅣ김남수목사]
I. 행14:11-18절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남으로 두 사도를 신으로 알고 제사지내려 함(행14:11-18)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놀러 기적을 행하게 해주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침으로 이 지방 사람들에게 우상으로 숭배를 받을 뻔 했는데, 그것을 만류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이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모양이며, 바울은 순전히 이교도 사이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1) 본문 9-10절 까지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고 일으킨 내용입니다.
바울이 설교하면서 자세히 말씀을 듣는 불쌍한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종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 속에 믿음이 생겨나고,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영혼이 소생하는 것을 바울은 영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에는 분명히 육체도 회복되리라고 바울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에게 크게 명령했습니다.“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치니, 앉은뱅이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기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큰 기적이었습니다. 즉각적으로 이 기적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2) 본문 11-13절에 보면,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제물인 소와, 소에게 씌울 화관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앞에 엎드려 제물을 불태우므로 제사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이야기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니 우리가 섬겨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물을 차려놓았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이것을 보고 거절하며, 제사를 못하게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신화적 전설이 내려옵니다. 신화는 만들어진 이야기인데, 신화 속에는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2절에 “쓰스”라는 말이 있는데, 헬라 사람들이 섬기는 「제우스」신을 가리킵니다. 제우스신은 모든 신중의 신의 왕으로 추앙되고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로마 사람들의 말로 하면 「쥬피터」입니다. 또한, “헤르메스”는 헬라 사람들의 신입니다. 신화를 보면, “쓰스와 헤르메스” 이 두 신이 하늘에서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람으로 변장하고 지상으로 내려 왔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마우스가 자기 집으로 모셔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우스신이 하늘로 올라가서는 자기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마을을 다 진멸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영접한 이 두 사람으로 제우스 신당을 지키는 수호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죽은 자리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겼다고 합니다. 신을 영접한 두 사람이 변해서 큰 나무가 된 것이라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신화를 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나서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는 “쓰스”이고, 하나는 “헤르메스” 이다. 두신이 내려 오셨다.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 그래서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려고 서두르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것을 절대로 못하게 말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숭배하려고 합니까? 우상을 숭배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생각해 보십시다. 그 하나는, 소원이 있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서 힘을 빌려야 하겠는데, 나무에다 빌고, 산에다 빌고, 아무데나 빌어서 자기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고 할 때 아무 신이라도 만들어 그것에 빌어서라도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 보면 골목골목, 집집마다 조그만 우상과 그 우상의 집을 만들어 놓고, 그 것을 자기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권력자들이 동상이나 자기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다 경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어디서나 경배하라. 그래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북의 김일성 일가는 전국에 김일성과 김정일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며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북 공산당에게 김일성 김정일은 신이며,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동상에 훼손을 입힌다면 그 사람은 공개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신비에 대한 우상숭배입니다. 신비 대한 우상 숭배는 - 뭐가 좀 이상하게 보이면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바위가 좀 특이하게 생겼으면 거기에다 대고 절을 하고, 나무가 크거나 몇 백 년 되어 이상하게 생겼으면 신비한 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합니다. 신비한 것을 보았거나 체험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 그 깊은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신비한 것을 보는 순간에 절을 하고 숭배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신비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벌떡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이 때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선생님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사도들의 대답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고 아마 했겠지요. 그런데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네끼리 제물을 가져다가 신으로 섬기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입니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신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자연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은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자연 자체를 섬기고 경배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아무리 신비하고 신기해도 자연을 섬기고 그 앞에 절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무릇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더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면 기독교에서는 이단이 됩니다. 통일교, 신천지, 안상홍의 자칭 하나님의 교회 등 이런 집단들은 교주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오직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이지, 결코 자연이나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면, 바울은 지금 자기를 경배하면서 우상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극구 사양하고 못하도록 말리고 있습니다.
3) 본문 15~18절에도 나옵니다. 15절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고 합니다. 바울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은 주께서 하신 일이지, 결코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별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들도 믿으면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를 절대로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마시오.”설득력 있는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자기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17,18절에 이런 결론은 짓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그런 헛된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연계시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또한 우리가 마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면 하늘의 별을 보고, 재난과 폭풍과 벼락을 보고, 매일 매일 신문을 보고,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나의 나 됨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19-28)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신으로 섬기려고까지 환영을 받았는가 하면, 또한 격렬한 핍박을 받아 돌에 맞고 죽은 자 같이 되었으며, 거기를 떠나 더베까지 갔다가 파송한 안디옥까지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로써 바울의 제 1차 세계 전도 여행이 끝난 것입니다.
1) 본문 19-21절에서 보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몇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가 나쁜 사람이다”라고 선동하니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지라, 금방 제사 지내겠다고 한 사람들이 선동에 넘어가 돌변하여 돌로 쳐 죽이겠다고 야단법석 입니다.
가차 없이 돌로 쳐 초죽음이 되니까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내다 버립니다. 생각해 보면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들은 안디옥에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여기까지 살인원정을 와서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온 성을 선동함으로 군중심리를 이용해 폭동을 일으키고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19절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합니다. 유대인들은 규례대로 돌을 던져 마구 치다보니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때 바울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3층천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죽고 나니까 돌로 친 사람들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법은 로마인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일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은 로마인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민족의 자치법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므로 돌로 쳐 태형을 가할 수는 있지만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였습니다. 따라서 겁이 났습니다. 살인죄의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외로 내치고, 살인자들이 자기들의 살인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죄 위에, 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 문제를 하나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벌떡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왜 바울이 돌로 맞아 죽는데, 안 죽게 할 수는 없느냐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비난하던 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 올 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를 많이 살리신 분이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말입니다. 오늘날도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왜 핍박당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느냐 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매 맞지 않도록 왜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데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천국에 못 들어갈 사람을 천국 들어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주 예수 믿고 천국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핍박당하지 않고 고통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핍박,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으신 뜻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 안 당하게 하는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2)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굳은 마음을 가지라, 흔들리지 마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사도인 바울이 주는 권고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습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매 맞고, 욕먹고, 억울하고, 병들고, 이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환난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환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는 “파메마”입니다. 또 하나는, 외적 상황에 의한 환난 고통입니다. 헬라어로는 “들립시스”인데 경제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외적으로 오는 환난 고통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 초조에 떨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어떤 고난 속에서도 평안하고, 담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불안, 초조, 근심 걱정해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매도 맞고, 욕도 먹고, 외적 상황으로 오는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마십시오. 고통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어요. 진실하게 살고, 바르게 믿음으로 살면 핍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왜 핍박 환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작품을 만들고 계십니다.
마치, 강한 쇠를 만들기 위해 쇠 덩어리를 불어 넣었다가 꺼내 망치로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불에 넣었다가 꺼내 때리는 일을 반복하여, 많이 맞는 쇠가 강해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다져지고 다져져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환난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아픔이 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고통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사도들이 그랬고, 신실한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고난을 통해 전도가 가능해집니다. 고난을 통해 교만이 겸손해지고, 고난당한 자가 고난당한 자를 위로하면서 전도가 됩니다.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알렌」선교사가 많은 병을 고치니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콜레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여기에 감동받고, 문이 열려 예수 믿게 되었어요. 환난 속에서 겸손해지고, 순수해지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환난을 통해 고쳐요. 술을 못 끊는 사람이 위암이다 의사의 판정이 나니까 술을 딱 끊어 버립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의사가 위암 선고를 하니까 술을 끊습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환난 고통입니다.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 강해지고, 믿음이 굳건해지고, 천국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23절을 보면,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고, 교회를 조직하고, 믿은 바 주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말씀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들을 세우고 권면하고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23절에 “믿은 바 주께 위탁합니다. 하나님 지켜주시고, 힘을 주시고, 그들에게 은사를 주십시오.” 하고 위탁합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위탁하고 그 자리를 떠나 파송한 안디옥으로 갑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저들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이제 26절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노력하고 수고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순수해지고 바른 자세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작가 메디슨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시를 소개하므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해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 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어 주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감사하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러고 나서, 나의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