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10 ㅣ 김남수 목사]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과 안디옥 교회의 보내심을 받아 첫 선교지가 구브로 섬으로 그 섬에서 엘루마 박수가 소경이 되는 기적으로 이 섬의 총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두 사도는 대륙으로 올라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의 긴 설교를 하므로 이방인들이 많이 믿고 기뻐했으나, 유대인들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박해함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피하여”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이 두 도시는 인접한 곳으로 전도하는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구브로 섬에서도 복음을 대적하는 엘루마 박수가 소경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 총독이 이를 보고 믿게 되었는데, 이 두 도시에서도 기적이 일어나므로 복음을 전하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기적과 표적은 복음전파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많이 믿으나,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박해했습니다. 오늘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전도와“구원받을만한 믿음”에 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I. 이고니온 전도(행14:1-7)
본문 1-7은 이고니온에서 선교활동과 그 결과를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나 이렇게 일했고, 이렇게 결실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울의 전도 여행 전체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내용입니다.
1절에“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갔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원주민과 접촉할 수 있고, 전도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서로 협력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단합심과 서로 간의 애정을 나타내 주었고, 청중들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보라 저들이 어떻게 사랑하는가.”라고 말하며 기독교를 좋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상대방의 증언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전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인과 헬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두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니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사도들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따라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복음전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복음전도의 성공은 사도들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 이셨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의 말씀에 “함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함께”라는 말은“이전과 마찬가지로”또는“전과 같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지,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이 바울의 습관이요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전도가 반대에 부딪칩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안 믿을 뿐만 아니라, 핍박이 적극적입니다. 2절에“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사도들의 복음은 많은 이방인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들이 믿게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받아들임으로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자극이 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어떤 유대인들이게는 악한 시기심을 일으켜 복음을 대적히는 일을 전개하게 하였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시도들을 거짓된 말로 이방인의 귀를 현혹시켜“악감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도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고생을 하면서도 회당에 다시 들어 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방법이요 열의였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바울이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 중요한 말씀입니다. 3절에“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이 같은 담력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용기가 어디에 근거한 것이냐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대로 주님이 사도들과 함께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과 힘을 의지하고 나갈 때 주님은 결코 약속을 져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는 특히 사도들에 관하여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 거하므로, 주님도 그들과 함께 하시어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신앙으로 인한 무서운 담력이 함께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저들과 함께 동역하고 계심을 증거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 표적과 함께 용기가 생깁니다. 아! 내가 하는 일이 곧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이런 확증을 얻으면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병에 걸렸는데, 기도하면서 낫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을 체험했을 때에 경험하는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 이것을 체험하고 이것을 확증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적과 함께 체험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겠습니까? 또, 병 고침 받는 사람들도 주님께서 친히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감격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적과 병 고침은 더욱 큰 신앙을 가지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됨으로 성내 무리가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4, 5절에“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복음에는 심판성이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그렇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고 회개하고 은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다 은혜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12 사도 중 하나가 가룟 유다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고니온에서 이렇게 큰 능력이 나타나고,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이 위대한 역사가 있는데도 불굴하고, 일부는 믿고 일부는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딱 두 패로 나뉘다 보니 저 사람이 믿으니까, 나는 안 믿는다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나오니까 이제는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성 사람들이 둘로 나누어지면서 결국은 핍박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바울을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또 핍박받는 사람은 더 열심히 믿게 되고, 극과 극으로 나눠집니다.
이단의 특징이 분리주의, 분파주의입니다. 이단은 평안한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 영적지도자들을 비난하고, 이들의 말을 대적하여 성도들이 못 믿도록 꼬드기며, 자기를 따르게 하는 분리를 조성합니다. 간교하게 교회를 파멸시키려고 대적하며, 자기를 따르게 하는 분파 그룹을 짓는다면, 교우들도 모든 개인적인 감정을 젖혀 놓고, 깨어 분별하며 연합함으로 이런 분리주의자들을 대적하여 교회의 연합과 보존을 위하여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분파가 생깁니다.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똑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은혜의 말씀을 듣고, 똑같은 은혜를 체험했는데도, 한 사람은 믿고 한 사람은 안 믿는 것 - 이것이 오늘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악하고 이성을 잃은 무리들의 손에서 사도들이 도망을 칩니다.
6, 7절에“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사전에 눈치 채고 루스드라와 더베로 명예로운 퇴각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 성에서 복음을 듣지 않고 핍박하거든 떠나 다른 성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사도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하여 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하니까 이고니온으로 왔고, 이고니온에서의 전도가 성공을 하니까 또 핍박을 합니다. 이번에는 또 루스드라로 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피하여 다니면서 한 결 같이 전도합니다. 바울은 죽을 때와, 피할 때를 알았습니다. 피하여 어디가나 전도합니다. 전도가 중단된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고니온에 어떤 교회를 세웠고, 얼마나 많이 믿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눈앞에 전도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낙심할 때도 있고, 누가 믿는지 알 수가 없을 때도 있지만, 부지런히 전도하다 보면 훌륭한 주의 종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숫자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 없습니다.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업적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전하고 전하다 보면, 하나님의 사업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뿌려 놓고 수고하면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것입니다.
II. 루스드라 전도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남과 구원받을만한 믿음 (8~10) 루스드라에서의 전도는 특기할 만한 기적이 있었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역사입니다.
8절에,“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본 절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발을 쓰지 못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기 때문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본 절의 특징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앉은뱅이가 말씀을듣더라 합니다. 9절에“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듣거늘”은 헬라어의“아쿠오” 듣다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서 듣고 있는 모습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그는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지속적으로 계속 듣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들어나갔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화를 받았으며, 이 메시지가 하늘로부터 온 메시지임을 믿었고, 치료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그가“치료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영적인 분별력을 통해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주일 낮 예배는 물론이요, 오후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등 이 앉은뱅이처럼 말씀을 계속 들으면 믿음이 더욱 자라고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10:17에“믿음은 들름에서 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이러한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영혼이 강건해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말씀의 능력이 몸에까지 작동하면서 엄청난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 9절에“바울이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라고 합니다.
앉은뱅이가 모든 사람보다 열심히 들으면서 집중하여 바울을 쳐다보니까, 바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면 다 보입니다. 부스럭거리는 사람, 조는 사람, 궁시랑 거리는 사람, 쿡쿡 찌르는 사람, 귀속 말로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자꾸 보이면 좋지 않습니다. 심기가 편치 않습니다. 설교 시 소리 지른다고만 하지 말고, 그 원인을 제공하지 마십시오. 설교학에서 “100% 우등생일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를 잘 하는 비결은, 제일 열심히 듣는 사람을 보고 설교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열심히 듣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아멘아멘 하면서 듣고, 웃을 때는 웃고, 울 일이 있을 때는 울고, 이런 사람을 쳐다보면서 설교해야 할 말도 재미있고, 힘도 나고, 그렇지요. 졸고 있는 사람, 궁시랑 거리는 사람을 보면 재미가 없고 힘이 떨어집니다.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유독 앉은뱅이 이 사람이 열심히 듣습니다. 얼굴이 환히 밝아집니다. 바울이 그 듣는 사람을 보는 순간, 바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를 주목하고 보는 사이에 확신이 옵니다. 저 정도라면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설교자 - 바울의 마음에 생겼습니다. 저 사람 심령 속에 영혼이 구원받고, 성령이 역사하고 있구나! 그리하여“일어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것이 도대체 무슨 믿음입니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롬10:17에 “믿음은 복음을 들름에서 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즉 말씀을 들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기독교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순간부터 그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의 한 예입니다.
낯선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 안합니다. 열심히 듣습니다. 집중하여 듣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바로 이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지고, 영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앉은뱅이가 그런 자세였습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 이것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보며, 그렇다면 육적으로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이란 영혼구원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병 고침 받는 것,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몸의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이 그 영혼 속에 들어 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고, 육체가 구원 받을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에는 영혼이 구원받는 믿음이 있고, 또 하나는 이적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에 걸렸을 때“나는 병원에 가 치료 받겠다”이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하면 나을 것이다”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권능을 믿는 믿음은, 또 하나의 특수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십시오. 믿음이 순종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그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가 믿음을 가지고 바울의 명령을 좇아 행동에 옮김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하여 행동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한 것입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행동하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적은 곧 설교입니다. 설교 속에는 이적으로 증거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많이 설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각자 그가 가진 믿음대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믿음이 있어서 큰 구원을 받을 것이고, 저런 사람은 저런 믿음이 있어서 저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생활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구원을 받고 큰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바울더러“나를 고쳐 주세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구원받을만하게 된 순간에 이와 같은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된 것이고,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지심으로
영혼이 구원받고, 몸도 구원 받고, 환경까지도 구원 받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면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