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4-12 | 김남수 목사]
성령과 안디옥 교회의 보내심을 받은 첫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의 첫 선교지는 구브로 섬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전도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복음을 대적하던 엘루마 박수는 소경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I. 구브로 선교(행13:4-5)
오늘 본문 4절에“구브로에 가서”라고 합니다. 구브로는 지금 사이프러스(Cyprus)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인데 바나바와 바울의 제 1차 선교 여행의 첫 선교지 이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개명된 곳이기도 하며, 특기할 것은 비너스 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비너스의 우상이 많았으며, 비너스는 미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치하고 환락가가 많았습니다. 음탕하고, 부도덕하고, 쓸 것이 많은 곳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주님을 바로 때문에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성령의 음성을 들르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 때는, 주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뜻으로 행하기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주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만사가 형통한 것입니다.
5절에 살라미라고 하는 곳은 이 섬의 가장 큰 도시이고, 또 바보라고 하는 도시는 행정의 중심지로 이 섬의 수도입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의 특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살라미는 큰 도시로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회당에 안식일이면 유대인들이 모이므로 그 모인 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교에서 문화권을 넘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사이 우리네를 보면,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사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예를 들면 파키스탄을 갔다고 해 봅시다. 파키스탄 말을 조금 배워가지고 가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요.그러므로 파키스탄에 간 한국선교사가 맨 먼저 찾아야 할 곳이 어디냐 하면, 거기서 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하면서 사는 한국교민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민들은 파키스탄 말인 우르드어(Urdu어)도 구사하고 한국말도 구사합니다. 그런 교민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선교사가 떠나와도 그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이미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것이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가는 곳마다 회당이 있으니 거기 가서 복음을 전했고, 이런 유대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는 현지 전도자가 되고 말더라는 이 말씀입니다.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이제 사도 바울이 구브로 섬에 처음으로 가서, 이 곳 문화며 언어며 다 익히려고 덤빈다면 선교사역은 참으로 요연한 먼 길이 됩니다.그래서 이 곳 문화 전반에 익숙해진 유대사람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원리를 판교에 있는 우리교회에 적용하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잘 들어 보십시오. 이곳에 사는 주민과, 또한 전도하면 쉽게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근거리에 사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먼 곳에 사는 분들을 대상으로 삼으면 그들은 믿어도 돌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혼모가 추운 겨울에 아이를 낳아 길거리에 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우선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그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으면서 빛 된 삶을 살면, 그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마음이 열리게 될 때, 그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되면, 그 분들이 또 이 지역의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에게 연줄연줄 복음을 전하게 되므로 예수 믿게 되고, 또 믿는 그 분들을 훈련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교회성장의 중요한 원리가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훈련을 받아 전도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목적인 사명을 다 하는 삶인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므로 전도 안하면 살인이나 도적질과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날씨도 서늘해졌으니 잠에서 깨어 일어납시다. 여러분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이사 온 첫째 이유가 같이 이곳에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을 더욱 더 잘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사는 분들과 그분들의 영혼을 구원할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자녀 키우고 시간 나면 잠이나 자고 한다면, 그것은 허비된 삶이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 한 분 전도하면 삶에 보람과 활력을 얻고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보람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며 구브로 태생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맨 먼저 전도하러 자기 고향의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 믿어 영생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모시고 자기 고향에 전도하러 간 것입니다. 일가친척 친구들이 예수 믿어 영생 얻어야 되겠다고 해서 고향에 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석이나 구정이 되면 친척들이 서로 만날 때, 친척 중에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분들이 예수 믿도록 기도하고 선물도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이번 추석명절에 고향에 갈 때는 선물을 사가지고, 또한 전도지를 친척들뿐만 아니라, 아는 분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고 전도책자를 여유 있게 충분히 가지고 가서 읽어 주어 전도도 하고, 또한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다. 전도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사랑으로 정성을 드리면, 이번에 열매를 따는 일이 있어질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영생을 선물하는 복된 추석명절이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본문 5절에“마가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바나바가 삼촌이기 때문에 선교여행에 따라 나섰습니다.본문에서는 “수행원”이라고 했는데, 수행원은 헬라어로“휴페레텐”으로 이 말은“따라 모신다,” “시중을 든다,”는 뜻입니다. 선교는 혼자 다니는 것보다 돕는 수행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를 교육하기 위함입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설교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계자,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교회를 세운 다음에, 그 교회에서 후속목회를 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제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만, 어디는 요한이요, 어디는 디모데요, 어디는 디도요, 이렇게 수행자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 바울이 떠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어떤 때는 몇 달, 어떤 때는 몇 년, 계속해서 목회를 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서 끊어지면 안 됩니다. 이어지려면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책자 하나 만드는데도 돕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은 후계자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듯,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실 것입니다.
II. 엘루마 박수를 만남과 총독이 구원 받음(행13:6-13)
본문 6-8절까지는 박수 엘루마와의 특별한 만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예수”로 “예수의 아들” 즉 “구원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이지만 이름과는 다르게“거짓 선지자”,“박수 마술사”,“점쟁이”이었습니다. 이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7절에 보면“지혜 있는 사 람이라.”했습니다. 낯선 바나바와 사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불러 들여 자세히 듣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박해부터 하지 않고 듣기를 좋아합니다. 바울을 불러들여 들었습니다. 지혜는 귀담아 잘 듣는 것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총독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얼마든지 편견을 가지고 화를 내고 배척할 수도 있지만, 이성으로 사리를 판단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려고 했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련 서럽게 자기 고집이나 주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원수 마술사 엘루마는 8절을 보면, 전도자 바울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하여금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총독이 예수를 믿으면 무당에게는 큰 손해가 되고, 자기는 죽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정면으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의 특성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훼방을 하는데, 목사와 전도사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대적을 하며,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훈련을 받지 않습니다. 밖에 성경공부를 잘 가르치는 데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자고 하면서, 교인들을 꼬여 유혹해 내고 교회를 파괴시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전에 『이미순 전도사』를 불러내 같이 차를 마시면서 목사를 비방하며 분란을 꾀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독버섯 같은 악한 자들이며, 사람으로 치면 암과 같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깨어 잘 분별하여 발을 붙이지 목하도록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단자들과 인사도 하지 말고, 집에 들여 교제도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본문 9절에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은 엘루마의 대적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로 단호하게 공박을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성령이 충만하여” “불타오르는 영”도 성령의 은사의 하나입니다. 그는 능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그에게 퍼부었습니다. 마치 사49:2절의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셨다” 함과 같았습니다. 개인의 원한 때문이 아니었고,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강하게 충동하셨으므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엘루마를 주목하였습니다.” 그의 사악한 수작에 대하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이 그를 향하여 보고 계심을 표시하듯, 그를 주목하고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엘루마가 자기의 행위에 대한 후회의 표정이 있는가를 그의 안색에서 분별하려고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만일 그에게서 가책의 기미를 발견했다면 저주를 받는 것은 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엘루마를 다음과 같이 성령으로 명한 것입니다. 10절에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여,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이의 원수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그는 엘루마에게 “마귀의 자식이라” 했습니다. 악한 자의 자녀로 그 이름이 “예수의 아들” “구원의 아들” 이라 불렀지만, “마귀의 자식”으로 마귀를 닮은 간교하고 거짓으로 속이는 사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의의 원수가 되는 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대적하는 모든 의의 원수였습니다.
바울은 엘루마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주의 바른 길을 굽히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고 선포했습니다. 주의 길을 가르치는 것은 바르지 않는 것이 없고, 주의 길은 그야말로 바르고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바른 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길을 그르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자들이 마귀입니다. 마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자들이 그 누구건 막론하고 그는 마귀입니다. 그는 바른길에서 벗어나 방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엘루마에게 심판을 명하여, 당장 눈이 멀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11절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그는 총독으로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려 했기에 그러므로 그는 저주를 받아 소경이 된 것입니다. 또한 “얼마동안 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다시 시력이 회복되리라고 볼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지 않아도 시력이 회복되리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명령한 이 심판은 얼마 있다가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었습니다.” 이 기적은 즉시 그를 잠잠케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기적은 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소경이 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총독의 신앙의 안내자인척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엘루마는 참된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안내할 사람을 두루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가치 있게 여기던 마술로는 스스로의 길을 찾을 수조차 없게 되었고, 또 그를 친절히 안내해 줄 친구도 찾지 못했습니다. 기적은 총독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2절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기니라” 엘루마가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기적은 엘루마 박수도 신앙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을 믿는데 기여합니다. 총독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기적을 보면서 신적인 비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설교의 비범함과 능력도 보았습니다. 총독은 바울이 행한 기적을 보고, 바울의 능력이 박수보다 훨씬 강하고 엘루마가 낭패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총독이 믿게 된 이 하나님의 역사는 마귀의 어떤 방해도 좌절될 수 없음을 보여주며, 방해나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령 충만은 더 강해지며 하나님의 역사도 더 강해져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후부터는 계속 바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바울입니다.
그 당시에 이름을 두 가지로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히브리사람인 경우는 히브리식 이름이 있고, 헬라식 이름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부르거나 기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게바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한사람입니다. 바울에게도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히브리적 인상이 깊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라틴어로“작다”는 뜻인데, 총독 서기오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사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선교적인 편의를 위하여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사명을 행함에 있어서 어중간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철저히 헌신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오로지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에 있어서 참으로 예수 다음으로 귀하고 위대한 지도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