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2:20-13:3 | 김남수 목사]
I. 헤롯의 죽음(행2:20-25)
헤롯이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해 야고보를 죽이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헤롯이 죽음으로 박해는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헤롯 아그립바 I세는 유대백성들, 특별히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무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유 없이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야고보를 죽였더니 유대인들이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잡아 감옥에 가두었는데, 뜻밖에도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출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기적적으로 출옥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사실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닙니까? 천사가 이렇게 기적을 행했다면, 그 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 전혀 무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합니다. 불의한 사람이 잘 되고, 형통한 것을 부러워하고 성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해서 크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죄를 지으면 오히려 실패하고 잘못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20절에“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입니다. 이 사람들은 헤롯의 영토인 갈릴리 지방에서 식량을 가져다 먹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식량 등 무엇을 무역하려고 하면 두로와 시돈항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두로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이 헤롯의 말을 잘 들어 주지 않았던가 봅니다. 헤롯이 식량봉쇄를 취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에 헤롯이 노여워 기분이 좋지 않아 두고 보자 한 번 혼을 내줄테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로와 시돈 사람들이 부득불 헤롯과 화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마침 21절-23절에“헤롯이 날을 택하여”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축제는 여러 날 계속 되는데 그 둘째 날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잔치지만, 황제는 그 자리에 없으므로 결국은 헤롯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됩니다. 헤롯은 은으로 만든 찬란한 옷을 입고 상석에 앉아서 뭇 시선으로부터 영광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이때를 틈을 타서 헤롯왕의 환심을 사고 자기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헤롯의 연설 끝에 아첨하는 큰 소리로 “이것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다.”하고 큰 소리로 질렀습니다. 헤롯은 기분이 좋았겠지요.
만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불경 스럽다. 그런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하고 책망했어야 하는데,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첨을 받아들이는 그때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극장 천정 기둥에 앉아 있는 불길한 징조의 새 올빼미를 보았고, 그 순간에 복통이 일어나 궁정으로 옮겨졌지만, 배에 버러지가 일어 닷새 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불의한 중에 형통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하여 항상 민감해야 합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했는데도 아무 가책이 없는 것은 도덕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신”이라고 군중의 칭호를 받았는데 수용하고 가만히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더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은 심판하십니다. 심판하실 때, 당장 그 순간에 벼락으로 내리치지는 않습니다. 교회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 보세요. 얼마 후면, 그는 자기 함정에 빠져서 자기 죄로 인하여 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핍박 자를 심판하시는 방법입니다. 야고보를 죽이는 순간에 헤롯은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에 돌아가서 그는 영광을 누리면서 작은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자기 죄로 인하여 심판받도록 심판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 영광 돌려야 할 일을, 내가 영광을 가로채는 이런 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교회를 극단적으로 핍박했던 사람이 죽어버리니까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가더라도 합니다. 25절에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의 구제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마가 요한을 동반했다고 합니다.
II. 안디옥 선교회(행13:1-3)
13장 1절에“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새로운 전환점을 읽게 됩니다. 그간 1장부터 12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13장부터 28장까지는 중심이 안디옥 교회로 넘어갑니다. 전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이 전도의 대상이며, 중심인물은 베드로였습니다. 후자는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며, 중심인물은 사도 바울로 바울의 제 1~4차전도 여행으로 되어 집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선교에 비상조치가 취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핍박입니다. 스데반이 죽고 야고보가 죽습니다. 결국 교회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사마리아로 가고, 가이사랴로 가고, 그리고 구브로와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의 3 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예루살렘보다 훨씬 크고 훨씬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예수 믿고, 헌신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이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헤롯왕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핍박은 잠시 멈추어지게 됩니다. 교회를 대적하던 상황은 호전되었습니다. 마음대로 복음을 전해도 방해받는 일이 없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는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합니다. 핍박이 없어지고 평안하게 되면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양적으로 성장할 때는 질적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평안할 때 아무 핍박이나 어려움이 없을 때, 그럴 때는 안일해지고, 분쟁이 생기고, 시비도 있고, 문제꺼리가 나타나고... 질적으로 떨어집니다. 이단 사설도 많고, 거짓 교사도 나타나게 되고, 거짓 교인도 횡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핍박을 당하게 되면 가짜는 다 물러갑니다.
다 도망가고 순수한 교인, 참된 신앙만 가진 사람들만 순교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그 역사를 보면, 이 같은 사실은 예외 없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1907년의 부흥으로 인해서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큰 부흥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사람이 다 교회에 나오게 되니까 양적으로는 성장했는데 교회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05인 사건”이라는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105 명이 끌려가 죽는 무서운 사건이 생기니까, 소위 개화 교인이라고 하는 외국 세속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다 물러가고 순순한 기독교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핍박 속에서 교회는 질적으로 성장합니다.
오늘날도, 어느 교회든지 교인이 적든 수만 명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에 중요한 사람은 몇 사람입니다. 이 몇 사람이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목회학에서는“책임지는 교인”, “영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책임지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를 내 집처럼, 아니 내 집보다 훨씬 중요시 여기고, 생명을 바쳐 가면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일 날 한 번만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중요한 일꾼, 몇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하겠습니다.
1 절에“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사도이면서 동시에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그는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성경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는 동시에, 그 계시를 오류가 없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기록하도록 하나님의 영감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계시나 영감을 받는 일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성경을 기록한 것과 같은 계시나 영감은 2000 년 전에 다 끝났습니다. 이 선지자는 어느 한 교회에 메이지 않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메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오고, 가고, 말하고 했습니다. 한편, ‘교사’는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하여 성경에 예언된 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교사입니다. 한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교회시대 교사의 은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주어집니다. 1절에 대표적인 일꾼 선지자와 교사 몇 명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의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일 년 동안 있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을 그 고향 다소에 가서 사울을 불러와 같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이 여기서 일 년 동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교회를 세웁니다. 이렇게 두 사람 바나바와 사울을 들 수 있습니다.
다음은“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는 라틴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니게르라는 시몬은 아프리카 흑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안디옥 교회는 인종을 초월해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루기오는 구레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니게르와 동향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라고 말합니다. 젖동생은 어렸을 때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동복동생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도 벌써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 사울, 시몬, 루기오, 마나엔 이 지도자들이 전부 안디옥 사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 다소에서 온 사람,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 ... 이렇게 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의 주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교사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을 보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주를 섬겨”-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섬긴다”는 헬라어는 “레이투르”라는 말은 두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봉사”와 “예배”입니다. 영어로는 “service”와“worship”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이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예배했다 무슨 뜻입니까? 예배는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앞에 경배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러르고 지극히 사랑하는 것, 주님과 만남의 관계가 예배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섬기며 특별히 금식하며 섬겼다고 합니다. 먹는 욕망이나 세속적인 욕망 같은 것을 다 끊어 버리고 영적으로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여 단순한 마음으로 예재했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금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40 일 동안 금식을 하셨고, 경건한 믿음의 선지들도 금식을 중요시 여기고 금식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40 일 동안 금식하는 것은 3 년 동안 신학하는 것 보다 더 힘이 들어요. 그러나 금식이 주는 유익은 참 큽니다.
인내를 키우고, 자신을 죽이고, 세상과 적을 이기는데 큰 힘을 얻습니다. 주님을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2 절에“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내가 필요해서 시키는 것이니“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에게 일거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주십니다. 당신의 일을 위하여 그에 적합한 사람을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하고 싶다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야 합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따로 세우셔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느 사람은 자칭 선교사라고 하며 출판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선교사가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때입니다. 3 절에“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순종하고 있어요. 성령께서“보내라”고 하십니다.
sending body, 보내는 자가 있고, 가는 자가 있습니다.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보내셔야 갑니다. 또한, 지금 교회도 보내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아까운 인재입니까? “안디옥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인데 보내다니요?”라고 불만스러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군말 없이 보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일 저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안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스데반 사건이 또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보냈습니다. 이곳의 할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당신들은 가서 복음을 전하세요. 하고 보내는 마음 참 귀한 마음입니다. 안일한 곳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이 충만하여 파송되는 이 바나바와 사울의 모습을 한 번 보세요.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전도지 1000부를 제작했었는데, 다 사용해서, 또 좀 수정하여 2000 부를, 제 2쇄, 인쇄를 했습니다. 경비가 약 500 만원 들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책자 제작비를 위해 헌금하시고 싶은 분들은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일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흐뭇해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는 데로 하십시오. 우리 서 서울 노회, 전 노회장인 최 목사님도 전주에 40부를 구입했습니다. 우리 노회 교회들의 전도에 이 전도지가 귀하게 사용되어 교회 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도에 관심이 있는 성도와 교회는 살아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 안수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선교사 임직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특별히 따로 세워서 임직식 때 안수기도를 한 다음에 파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임직식이 모델이 되어 선교사를 파송할 때 임직식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의 기도를 받으면서, 저들은 보냄을 받으면서, 낯선 곳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이래서 안디옥 교회가 위대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인종을 초월했고, 귀한 일꾼들이 있는 교회요, 제 1호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선교의 본거지가 되는 교회, sending body가 되는 교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훌륭한 교회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