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2:1-19 | 김남수 목사]
스데반의 순교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교회는 일시 평안을 찾았으나, 이제 다시 헤롯 왕의 손에 의해 박해의 돌풍을 맞게 됩니다. 행12장은 헤롯에 의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가 잡혔으나, 기적으로 출옥한 사건을 주로 취급하고(1-9절), 헤롯의 죽음(20-23절)과 바나바와 바울의 귀환을 예화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투옥과 출옥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새로운 차원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 땅으로 흩어지게 되고, 마침내 안디옥까지 가게 되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지난주일 예배시간까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차원이 다릅니다. 행12:1-2절에“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이제는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인 야고보와 베드로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는“다섯 명의 헤롯”이 나타나는데, 대 헤롯으로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자입니다.(마2:16-18) 그의 아들 헤롯 아킬라오와, 헤롯 안티파스는 아킬라오의 동복 동생으로 세례 요한을 목벤 자이며(마14:1-12)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대헤롯의 손자로 본문의 헤롯입니다.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II세는 본문 헤롯 아그립바 I세의 자녀로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송사를 들었습니다(행26:28)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I세는 로마 황제의 특별한 호의로 받아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회주의자로서 로마인과 유대인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하여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대 야고보로, 알패오의 아들인 소야고보와 구별됩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요한, 베드로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3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이 야고보는 12 제자 중 최초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당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20:23에“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야고보기 장차 순교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순교는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좋고, 예수님이 사랑이 더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큰 은혜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야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12:3-4에“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본문의“기뻐하는 것을 보고”를 원문의 뜻대로 하면 “만족하는 것을 보고”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유대인이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까? 이것은 이미 기독교가 커져서 유대교에 대한 도덕적인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 특히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살아 역사하는 한 자기들의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고 있는 한 자기들은 무능한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차에 헤롯이 이렇게 나오니까 잘했다하고 박수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무교절이라”는 말은 유월절 절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월절이란 원래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는 절기입니다. 그 의미를 살려서 유월절이면 죄수 하나를 사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해방의 절기에 죄인도 사면을 하는데 사람을 체포한다거나 죽인다는 것은 유대인의 반발만 사게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절을 피해야겠다. 해서 저들은 체포한 베드로를 바로 죽이지 않고 대기상태에 있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되어 진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유월절만 지나면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처형하리라 하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천사가 와서 밤중에 베드로를 출옥시킨다는 이야기가 그 내용입니다. 본문에 군사 4 식인 4패는 둘은 죄수와 같이 차꼬 양 곁에 있게 하고, 둘은 첫째와 둘째 문의 파수를 봅니다. 그리고 밤 시간을 4등분하여 한 패가 세 시간씩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절에“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합니다. 12절에서도“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야고보의 죽음에 뒤이어 베드로가 투옥되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를 통하여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영적전투를 전개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6절에“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십자가를 피하려고 할 때에 엄청난 고통과 번민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각오하고 십자가에 죽기를 결심을 하고 나니 평안합니다. 감옥에 들어가 이제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인데 “두 군사 틈에 자더라.” 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인 대도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틈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군사 두 명은 첫째 문과 둘째 문에서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시편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7~10절을 보니 “천사”가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합니다. 옆구리를 쳐서 잠자는 자를 깨웠어요. 일어나라, 따라오라 -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더라.”합니다. 꼭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감옥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감옥 밖에 나온 뒤에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천사를 보내어 나를 출옥시키셨구나,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환상을 보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다만 이제 와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세요. 11절에 “내가 이제야 참으로” 라고 말씀합니다. 감옥 문을 나와서야 정신이든 것입니다. 감옥 문은 분명히 닫혀있는 그대로입니다. 베드로의 손에서는 쇠사슬이 벗겨졌으나 천지를 모르고 자고 있는 군사들의 손에는 쇠사슬이 아까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여기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베드로는 정신이 났고,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에“깨닫고”라 말씀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결코 기대했던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의 연장 - 이것은 내가 편안하게 잘 살고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주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시고자 하는 뜻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계속 축복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기도와 그 응답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12절에“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 곧바로 찾아간 곳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의 다락방인데 예루살렘 교회의 소위 본부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성만찬 예식을 행하신 곳,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던 그 곳입니다. 여기를 베드로가 찾아갔더니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가 투옥되어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렇게 희한한 능력으로 감옥을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본문 13절부터 15절을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와서 문을 두드린데, “로데”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문 앞으로 나왔다가 그 음성을 듣고 베드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녀는 전에 여기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음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먼저 문도 열줄 모른 채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더라.”하고 보고 합니다. 지금 정신없이 들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네가 미쳤다” 합니다. 아이는 “참말이다” 힘주어 말합니다. 어느 쪽이 참말입니까? 사람들은 소녀보고 미쳤다 하고, 소녀는 참말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소녀보고 미쳤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베드로가 감옥에 어떤 모습으로 갇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말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정작 베드로가 와서 서 있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여기에 참 대단한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보니 15절에 해석이 나오는데, 그러면 “그 천사라”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를 수호하는 천사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18:10절에“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켜보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호천사는 수호하는 사람과 모습과 음성이 똑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로데의 말을 듣고, 밖에 있는 사람이 베드로의 천사인가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적은 희귀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적이나 능력은 남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지, 능력이 없어도 될 곳에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계속 문을 두드립니다. 16절에“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베드로가 문을 못 여니까 두드리는 것입니다. 천사가 함께 할 때에 그는 옥문을 나올 수 있었지만, 이제 천사는 떠나고 그는 자연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문을 열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두드리더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적이 있고, 아무데서나 이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장소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렇게 기도해왔음에도 정작 베드로가 서있다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능력이 크고, 너무 예상 밖의 희한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베드로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반문했습니다. 17절에“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기도한 사람들을 방문해서 안심을 시킵니다. 감옥에서 나왔으면 한시 바삐 멀리 도망을 가든지 하지 여기는 왜 들려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말씀 몇 마디하고 그것을 전하라 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우리가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았다면 기도하는 모든 사람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간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애썼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병 나은 다음에는 기도한 사람들을 다 모아가지고 간증하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난주에 서울대 병원에 정기 검진을 갔는데, 저의 신장 “크리아틴 수치”가 좀 떨어졌습니다. 오늘날 의술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장은 치료가 오늘날 의술로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신장으로 교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많은 사람이 기도했으니 잠시라도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찾아와 “나 왔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나오게 하셨소. 큰 능력이 나타ㅅ났소.”하고 은혜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로 얻은 은혜 기도로 받은 은사는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다른 곳으로 가니라 하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감옥에서 나오는 놀라운 능력도 있는데 무엇이 겁이나 다른 데로 갑니까? 피신 겸해서 전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았으니 만큼 담대하게 나서서 이제는 잡을 테면 잡아보라 하고 베짱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또 다시 잡혀 감옥에 가면 다시 나오면 되는 거지 뭐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큰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다른 곳으로 피신합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능력은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시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감옥에서 나를 나오게 했으니까, 앞으로도 또 있을 것으로 여겨 다시 들어가도 좋다고 소리 지른다면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이사랴로 피신을 합니다. 떠나면서“이 말을 전하라”합니다. 감옥에 있을 때 된 이야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오게 하신 일, 희한하게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말을 모든 형제들에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전해 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겸손입니다. 합리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섭리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가운데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