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9-26 | 김남수 목사]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의 역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전도를 거쳐, 이제 3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땅 끝까지 전도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세계적 대 과업을 앞두고, 먼저 준비적인 몇 가지 사실들이 필요했습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대 전도자 사울의 회심(행9:1-31), 베드로의 이방 방문(행9:32-11:18), 그리고 대 전도의 근거지인 안디옥 교회의 설립(행11:19-30) 등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성령은 그들에게 말씀하시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I. 핍박으로 흩어진 익명의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를 설립(행11:19-21)
핍박으로 인하여 복음은 온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먼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것도 핍박 때문 이었습니다. 이렇게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는가 하면, 또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 가서 로마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지리적으로는 가이사랴이지만, 인종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는 이미 로마까지 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면 복음은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19절에“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안디옥 중심의 선교사역이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의 선교 전략에서도 아닙니다. 그 누구의 열심으로도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결국은 스데반이 순교했지요.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겨놓고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져 가는 길에 저들은 전도를 하게 됩니다.본문에 보는 대로 익명의 이방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안디옥교회가 세워집니다.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교회가 세워졌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마는 행8:4에 보면“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말씀합니다.살기 위해서 저들은 집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 바로 믿고 살기 위하여 저들은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고, 재산을 다 버리고, 이방으로 정처 없이 다닙니다. 나서서 방황하면서 저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 왔느냐, 왜 내 재산을 잃어버렸느냐, 흩어진 때에는 강압적으로 흩어진 것입니다마는, 흩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지금 안디옥까지 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환난을 당했고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여기에 중요한 의미를 정리하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 그들의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컨대 피난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두 번째, 고향을 떠났습니다. 직업도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아주 홀가분합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서게 됩니다. 또 셋째, 환난 중에 있었기 때문에 환난 중에 가정을 버리고 집을 버리고 떠날 정도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강인합니다. 독실한 믿음입니다. 어떤 핍박을 받아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요? 핍박 가운데서 얻어진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나는 삶들이 헬라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통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도망 왔다 하더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 벙어리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이 안 통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니 헬라 말을 잘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장벽과 문화적 장애가 없는 유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불러서 여기에 갖다 놓으신 것입니다. 전도하기에 아주 적절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충분한 선교사적 자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또 나아가서는 본문에 보는 대로 헬라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러므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1절에“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그들의 전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표시하는 표현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는데, 그들의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한 것입니다.막16:20절에“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여 믿게 되었고, 그들이“주께로 돌아 온 것이”그들의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3). 이 안디옥 도시가 어떤 도시입니까?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가 안디옥입니다. 2000 년 전 그 당시로는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인 것입니다. 교회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벌써 인구가 50만이었다고 합니다. 50만이면 굉장한 수준입니다. 기할 것은 50만의 1/7이 유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유대인의 회당도 많고 유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요. 여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가 크므로 그 만큼 영향력이 크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될 때에 그것은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하는 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유대인의 회당도 많고 유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도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요. 여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가 크므로 그만큼 영향력이 크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될 때에 그것은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하는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II. 덕망이 있는 큰 일꾼 바나바(행11:22-26)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어 안디옥 교회가 설립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양육을 돕고 교회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22절을 보면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습니다. 루살렘에서 파송된 바나바는 23절을 보니“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여기 보면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을 합니다.
1)“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바나바 역시 좋은 사람입니다. 이방이이냐 유대인이냐 이런 것 묻거나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 말씀을 잘 듣고 적용해야 합니다. 지방을 보고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따지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보세요. 사람을 사귈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사귀세요. 은혜 있는 사람하고 사귀면 여러분도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사람하고 사귀면 있던 믿음도 다 떨어집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도 은혜가 충만해 있는 사람 옆에 앉으면 여러분도 은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옆에 앉아 가지고 꾸벅 꾸벅 졸고 있다거나, 낙서나 하고 있다거나, 기지개 켜고 하품하고 있는 사람 옆에 있다면, 나까지 그렇게 됩니다. 모름지기 은혜 있는 자와 사귈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가 볼 때에는 은혜 밖에 보지 않았어요.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구원하셔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게 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이방 사람도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도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나타나 있구나. 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2)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권할 뿐, 다른 말이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섬기세요. 주님께 굳게 붙어 있으세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나바는 첫째 착한 사람이요 선한 사람입니다. 둘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모든 은혜가 충만할 때에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구제했던 사람입니다.다시 말하면 은혜를 마음에만 간직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그러한 성품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그에게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풍성히 주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일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주님의 영으로 인한 능력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본래 착한 성격을 타고 태어났어도 이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그런고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강권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굳게 세울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인도해 들이므로“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교회가 더하여 갔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바나바에게 특별히 나타나 것은 사도바울을 옹호하고 바울의 선교 사역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아직 사도로 역사하기 이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갔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전도하고자 했지마는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주지조차 않았습니다. 바울을 보고“이 사람이 한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인데 지금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 것인가”싶어 무서워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피하고 있을 때에 바나바가 나타났고 바나바는 바울에게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바나바는 바울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났고, 그리고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고,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아! 은혜가 거기 있었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구나, 하고 바울을 믿었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추천을 했어요. 바울 스스로가 자기를 증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바나바가 먼저 바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인 됨을 알고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전하고 옹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바나바는 이렇듯 중요한 사람이요 덕망이 높은 사람입니다. 또 본문에 보니 바나바는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만납니다. 25절, 26절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바나바는 고향에 가서 묻혀 있는 바울을 데려옵니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바울을 세웁니다.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선교사로서의 발동이 걸렸습니다.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 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하면서 요샛말로 하면 선교사로서의 실력 검사에 합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나바가 일 년 동안 바울의 후견인이 되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권위로서 그 신분을 보장했고, 동사동역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주의 일을 가르치기도 하고 권고도 하고 인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 바울 되게 하는 데는 바나바의 추천이 절대적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역시 바나바는 큰 인물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다른 사람이 훌륭한 일 하게 하는 것은 더욱 훌륭한 것입니다.나 혼자서 하는 것을 가법적이라 한다면 다른 사람을 훈련시켜서 함께 하는 것은 승법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에 목사님들을 6500 여명 훈련시켜 그 분들이 또한 교회에 돌아가 성도들을 훈련시켜 성도들이 치유하게 하였는데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30만 명 환자를 치유하거나 증세가 호전되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를 이렇게 세워 놓은 것으로 인해서 기독교에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이 됩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별명이 붙여집니다. 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누스 곧 크리스챤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됩니다. 크리스티아누스 -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비방하면서 붙여 준 이름입니다.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 - 이런 투로 붙여 준 것입니다. 교만한 유대인들이 자기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사실은 그때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하나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에 속한 기독교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 예수께 속한 사람들이라 칭하게 되니까 여기서 기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중심한 예수를 높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생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다른 위대한 사람들의 제자들이 그들을 그 위대한 선생의 후예임을 호칭하므로 자랑스럽게 여겼듯이 그들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전 세계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그 때문에 죽기도 하는 진리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적들은 이 칭호를 욕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고백하도록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에 복종할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책임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받으며 또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 그에게 존귀와 찬양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도 기독교인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독교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받고 찬양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존귀한 이름으로 욕보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중심으로 생각하며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후로 2000 년 동안 우리도 다 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