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17-37 | 김남수 목사]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보았습니다마는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의인이라고 까지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을 보는 시각은 서로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기도시간은 정해놓고 하루에 3 번씩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특별한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 입장애서는 다 그 계시를 두고 상당히 의심할 수도 있고, 생각할 여지도 많았습니다. 내가 잘 못 봤나? 잘 못 듣지나 않았나? 이 환상이 무슨 의미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들은 다 같이 주신 환상에 대하여 순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해보다 순종을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 온 보자기, 들려오는 음성 - 이것을 보고 듣고 나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17절)”라고 합니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나에게 지시하시려는지, 이것을 몰라 의심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시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찾아 온 것입니다. 유대사람으로서 이방인이 찾아오는 것을 보는 순간 아! 이런고로 속되다 하지마라 먹으라고 말씀하셨구나 하고 그 사건과 자기가 본 환상과를 연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 무슨 뜻인가? 하는 순간입니다.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20절) 일어나 함께 가라 하시니, 이제 따라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됨으로 베드로는 의심을 몰아내게 됩니다. 신앙적 의지로 의심을 극복합니다. 오직 주신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리하므로 의심이 고개를 쳐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에든지 판단 중지령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판단을 그만 하기로, 이제는 의심도 하지 않기로 -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의심을 하고 또 비탄을 합니까? 끝없는 의심이 있다면, 때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요. 어느 달, 어느 날, 몇 시 까지만 걱정하기로 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람한테 시집갈까, 저 사람한테 시집갈까... 죽을 때까지 생각해도 끝이 안 나요. 어느 달, 어느 날로 끝내자, 그 이상은 하자 - 이렇게 결딴을 내려야 합니다. “의심 말고 함께 가라”- 이 명령에 순종하므로 베드로는 의심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넬료의 신앙적 기본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베드로를 청해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마는 그 이전에 벌써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베드로를 청해서 말씀을 듣게 되면 첫 마디부터 마지막마디까지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할 생각입니다. 마8장에 나오는 백부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아주 군대식 신앙입니다. 태도가 분명합니다. 말씀해 보세요, 듣고 나서 생각해볼게요, 이로우면 듣고 해로우면 그만 두고요,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여기 고넬료의 마음은 그 자세가 백퍼센트 순종할 생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수용 자세입니다 -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 온 집으로 더불어 일가친척까지 다 모였어요. 앞의 2절에 보면“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일가친척까지 다 불러 들여서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 이런 음성을 들었다. 이거야 일생에 딱 한번 있을 일이다. 얼마나 소중한 간이냐? 다 와서 함께 말씀을 듣자“ 하고,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이 고넬료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자세히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입니다. 그리고 점령 지구에 와 있습니다. 백부장이니 지체가 높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갈릴리의 한 초라한 어부 입니다. 옷차림부터 초라합니다. 세상적인 위상이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세상 적으로 말하면 고넬료와 상대가 안돼요. 그런데 그런 고넬료가 그런 갈릴리 어부를 모셔다 놓고 보는 순간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합니다. 육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베드로를 우러러 봅니다. 높이 존경하여 봅니다. 그래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그 경외심의 구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집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다 보니 성경책도 사랑해요. 성경책은 어디까지나 한낱 인쇄물입니다. 책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읽고 구원받은 책입니다. 이 책이 아무데나 굴러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책이 상했거든 반드시 태워버리십시오. 찢어진 성경책이 이리 저리 굴러다니면 안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것이 이래저래 파지가 되어 가지고 방구석 아무렇게나 굴러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깨끗이 보다가 상해서 이제 이 책을 더 이상 못 보겠다하면 빨리 깨끗이 태워 없애야지요. 유념할 문제입니다. 성경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분이므로 그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보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체화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를 배척하는 자는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라”-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의 구체적 경건이 이러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정성껏 절했던지 베드로는 송구스러운 나머지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나도 사람이요 그러지 마시오. 나도 그대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합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고넬료의 영접을 가만히 앉아서 그냥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도 사람이요”하게 됩니다.
한편, 베드로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자신의 본래적 위치를 망각하지 않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엄청나게 높이 존경을 받고 엎드려 절을 받는 바로 그 시각에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인양 경배하는 고넬료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넬료 그의 경건입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과 같은 경배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도 사람이요” 합니다. 자기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을 다시 상기해 봅시다. 베드로가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러러 쳐다보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우쭐하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다음에는 이렇게 온유해졌어요. 온유. 겸손. 진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여기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8, 29절에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앞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는 “무슨 일로 불렀느냐”하고 묻습니다. 고넬료는 “오셨으니 잘 하셨나이다”(33절)하고 환영인사를 합니다. 이어서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가 지금 눈앞에 서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마음은 하나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같은 관계가 곧 신앙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보여 지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난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 언젠가 우리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는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거짓이 있으며, 무슨 교만이 있으며, 무슨 낙심이 있고, 무슨 문제가 따로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순간순간 하나님을 대면하고 진실하게 삽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면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듣기 위하여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종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실 바에야 아예 다 말씀하시지, 굳이 누구를 데려오라 어쩌라 한 다리 더 놓으시는가? 나한테 대놓고 말씀하시지 않고 왜 구차스럽게 간접으로 하시는가? 하필이면 베드로인가? 무엇 때문에 베드로가 필요한가? 내가 직접 받으면 그만 아닌가? 분명히 천사를 만났는데, 하나님의 음성도 한 번 들었는데, 기왕 그렇게 하실 바에야 바로 좍 다 말씀하시지 굳이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다니, 베드로를 통해서 들어야 하시다니, 왜 이 과정을 통해야 한단 말인가?“ - 이렇게 말입니다. 사실 요새도 보면, 이 같은 불만 때문에 시험에 빠진 사람이 있어요. 직통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하여 말씀 듣는 것도 불만스러워요. 왜 하필이면 목사님인가? 내가 직접 듣지, 그래 산에 올라가서 직접 듣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증인을 통해서, 또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고넬료는 간접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실수함으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불만스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저 사람은 실수도 많고 변변치 않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느냐 해서입니다. 그래 내가 직접 드리려고 나갔다가 불이 나와서 다 죽었지 않습니까? 누구를 지명했든지,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를 묻지 말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도 묻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는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은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를 통하여 말씀을 듣는 자세, 이것이 구체적 경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실수하거나 반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도 응답을 들을 수 있을 때에야 그 신앙생활이 구체화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꿈으로, 환상으로,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현실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바른 자세 - 고넬료에게서 볼 수 있는 자세인 것입니다. 베드로 또한 바른 자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경건합니다. 바른 자세에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인 경건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와 전도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