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19 | 김남수 목사]
오순절에 탄생한 교회의 선교의 역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거쳐 이제 제 3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전도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세계적 발전단계를 앞두고, 먼저 그 준비적인 몇 가지 사실들이 필요했습니다. 대전도자 사울의 회심, 베드로의 이방 방문, 이방 선교의 근거지인 안다옥 교회의 설립입니다.
I. 바울의 회심 (행9-1-9)
바울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만합니다. 특별히 인류 문화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사도 바울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종이요, 사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태어났고, 그곳은 헬레니즘의 중심지였으므로 일찍이 헬라의 철학과 문화에도 조예를 깊이 가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의 엄한 교훈하에서 자랐고, 예루살렘에 진출한 후에는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하며 엄격한 율법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져 로마천지를 활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세워 세계 복음화의 종을 삼기 위한 특별한 하나님의 준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큰 그릇의 회심이 복음역사의 일대 전환을 이룩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극악한 사람으로 있다가 한순간에 확 바뀌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를 핍박한 사람이 예수의 종이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람이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같이 드라마틱한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의 회심의 순간은 180도로 확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미적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닙니다. 핍박할 때는 철저하게 핍박하고, 전도할 때는 화끈하게 전도합니다. 바울의 회심이 본서에 3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의 회심하는 장면이 본문에 있습니다. 본서 9장은 바울의 회심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큰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어느 마을, 어느 장소에 가서 전도하든지, 이 이야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그 당시 되어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다음으로 행22:4-16이나 26:18 이하 등을 보면 사도바울이 스스로 경험한 일을 좍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나 이 이야기는 꼭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 자신의 구원의 간증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이러므로 자신의 구원 간증 문을 잘 다듬어서 준비해 놓으면, 듣는 사람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듣게 하는데 귀한 실제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되게 하는 기초적인 역사가 회심인 것입니다. 그의 회심이야 말로 그의 신앙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II. 바울은 방 선교를 위한 주님의 택한 그릇입니다(행 9:10-19).
사도바울의 회심은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회심이라고 합니다마는 바울 그가 자신이 스스로 회심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회심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역사였습니다. 예수에게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그래서 강권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뉘우치거나 그가 회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할 겨를도 없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기회를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만날 사람이 있다. 그것뿐입니다. 이 얼마나 강권적이고 일반적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사도 바울의 경험이란 것은 참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포로로 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바울은 문제를 거기서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오히려 육체의 약함을 통해서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에 고통을 더 크게 느낀 것 갚습니다. 육체가 약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건강해야 복음을 전하지, 약해가지고야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까지 합니다. 그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전도하고, 저주받을 까봐 그래서 끌려가는 모습으로 사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빌3:12을 보면“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잡혔다는 말은 포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도바울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께 포로 된 사람입니다. 그의 의지, 생각, 그의 의견, 사상 같은 것은 일체 불문입니다. 심지어 한 마디도 변명이나, 뉘우침의 소리를 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았습니다. 찍 소리 없이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자유를 온전히 박탈당한 순간입니다. 사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고, 주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부르셔서 저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 만나서 그를 치유하고, 그에게 내가 한 이야기를 일러라 하십니다. 두 사람에게 따로 따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다메섹으로 가라.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을 만나라. 쌍방에 아주 세밀하게 동시에 지시를 하셨으니 서로 연결된 것이 아닙니까? 아주 오묘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고,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6-9절에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시고,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는 10-16절 너는 아무개 집에 가서 사울에게 말할 것까지 다 일러 주셨어요. 얼마나 오묘한 일입니까? 나 혼자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밀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쌍방에 다 명하셔서 사건을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귀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남자 전도사를 상담했는데 어떤 여자가 남 전도사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당신과 결혼하면 선지자를 낳는다고 했다하면서 결혼하자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남 전도사에게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여자의 심령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쌍방에 동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했다 하는데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님으로부터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교회에서 배워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고 시시하게 그럴 것 뭐 있나. 직접 배우지,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 직접 부딪치려하다가 사고 납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주신 계시도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에게 가서 배우라 하셨습니다. 내가 아나니아를 통해 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초대교회 사도행전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마는 2장 3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충만했어요. 그러나 성령 충만 했다고 해서 통달한 것아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해서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에게 배웠어요. 내가 체험한 종교적 체험에 대하여 성서적 해석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서 아나니아를 통해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슨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보니 이것은 사도 바울을 사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 부터 직접 받았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다 받았다. 누구말도 안 듣는다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잘못되는 것 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로 부터 배웁니다. 본문 10절에 보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제자”가 있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10절에서 “제자”라고 하는 말은 예수 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4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12 제자를 제자라고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두루 “제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바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울에게 아나니아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가는 길이 아닙니까? 아나니아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고자 다메섹에 가는 길인데, 예수님께서 꽉 붙드시고 굴복시킨 다음에, 말하자면 내가 죽이려고 하던 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고 하십니다(6절). 사울 그가 하찮게 여기는 무식한 사람들, 율법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 사람에게서 배우라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자존심이 완전히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죽여 마땅한’사람인데, 가서 나 살려주시오, 나 안수해주시오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실인즉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회심이거든요. 사울은 이제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고 보니 그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 먼저 믿는 아나니아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는 것입니다. 도움 받는 자의 자세를 보여 주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은혜가 있지만, 다시 성도로부터 배워야 하고, 같은 제자로부터, 혹은 주의 종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도움 받는 자세에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일단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13, 14절에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우리가 저를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오히려 쫓아오는 저 사람을 만나라 하시니 될 말씀입니까? - 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나니아로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거절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 만날 때에 무어라고 말합니까? 17절에 “형제 사울아”합니다.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이 원수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 사울아” 보고 싶지도 않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 관계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 사울아”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불러 주어라 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의 마음은 그러했습니다. 왜 입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저도 사랑하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저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전혀 낯선 사람이지마는 인사가 이렇습니다. “형제 사울아”- 따뜻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에게 하시는 말씀은 보십시다. 우선은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15절에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하고 사울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택했다”하심은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하는 단순한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가 쓰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저를 부른다. - 그래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오묘한 경륜 안에서 적절한 인간을 부르십니다.
17, 18절을 보면,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자 안수하고 성령 충만케 하고 그리고 세례를 줍니다. 본문 19절에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고 합니다. 음식을 먹었습니다. 기도 받고 그대로 강건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바울이란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의지,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시는 그 역사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준비시켜 쓰십니다. 오묘한 방법으로 불러 쓰시고, 그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바울의 회심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 안에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도 한 사람 한사람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한 사건 하나하나가 깊이 생각하면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오늘도 분명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나 알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만나라고 하시니 만나야 했듯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저 사람을 만나라 하시면 미워도 만나야 합니다. 전도하라 하시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지를 암송하라 하시면 바빠도 암송해야 합니다. 모든 능력 있는 전도훈련은 전도메시지 하나를 암송하고, 열심히 실습하므로 전도의 능력을 익히고 무장하는 것입니다. 꿈에라도 보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만나라는 마음이 들면 만나야 돼요. 성령님의 인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쓰임에 모두가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