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1-4 | 김남수 목사]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의 전도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일어난 박해를 통해 복음은 사마리아로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그대로 번영하여 유대인이 거족적으로 주께 돌아와 유대적 그리스도교가 되었던들 복음은 유대인의 울타리를 넘어가 세계적 구원은 성취되지 못할 뻔했던 것입니다. 왜 그런지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1절에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은 누구보다도 유대교에 열심이어서 스데반의 죽임을 당연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며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죽음을 기뻐하였습니다.
흔히들 “만일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안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끼리만 예수 믿느라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전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의 지상명령도 저들은 실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럽나라들도 전부가 자기가 사는 나라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 한 뒤 독일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자고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루터는 선교에는 별 공헌을 하지 못했습니다. 칼빈도 제네바를 하나님 나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영국은 영국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저마다 자기네 나라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명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요. “승천하신 모습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반드시 감람산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전제하고 우리끼리만 열심히 믿고 전도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맞아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협소해진 생각을 깨뜨릴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선교의 동기가 새로운 차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적 지식이 높아지고, 선교적 정열이 생겨서, 아, 사마리아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로마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하고 저들 스스로가 생각을 바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와 모든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까? 본문이 이에 대하여 아주 오묘한 말씀을 합니다. 1절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 박해 때문에 더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죽게 되었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사마리아로 피해 간 것입니다. 이렇게 피난을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저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야 했던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로 보내셨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은 우리의 생각과 그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선교 사업을 하고, 어떤 학교를 세우고, 하는 우리의 선교 전략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 지금 저들은 핍박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숨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이로써 선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교 전략은 박해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은 우리가 원치 않는 현실이자 본래 받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엄연한 현실로 닥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선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나 역경 어려움이 오기 전에 미리 깨닫고 전도하고 열심히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 교회가 지금 전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전도지를 완성하면, 그 전도지 내용을 숙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분을 돕고자 해서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이 전도지를 사용하여 교회들이 변화되고 성장하는데, 우리의 조그만 봉사지만 사용되었으면 합니다.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2 절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 여기에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경건은 본래 유대인들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경건은 "두려워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총괄한 하나의 용어가 “경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들어야 할 제일 좋은 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 사람 참 경건해”하는 것이요, 둘은 “저 사람은 참 진실해”라는 말입니다. 경건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가정 일이든, 직장일이든,… 모든 일에서 먼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사람을 경건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말로 경건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2절에“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운다”는 말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울음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11:35). 우리는 소망도 있고, 영생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슬픔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모나 사랑하는 처자식이 죽으면 인간적인 정이 끊어지고,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이제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왜 우느냐, 책망하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데반이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길게 울어서는 안 되는 울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왜 울었을까”라는 질문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그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눅23: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은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고귀한 죽음을 맞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그 정을 잊지 못하여 울었겠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란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다하더라도 이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순교는 죽을 때 주시는 은사입니다. 순교하고 싶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같은 깨끗한 순교는 하나의 지고한 하나님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 하나의 긴 설교의 말씀을 하고, 천사의 얼굴로 돌을 맞아 죽은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또한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했습니다. 여기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여기 나오는 “잔멸하다”라는 원문을 살펴보면 그 뜻이 흥미롭습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는다.”라는 뜻입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원은 망가지고 말겠지요. 바로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교회를 핍박했다는 뜻입니다. 닥치는 대로 교인들은 잡아들이고, 닥치는 대로 죽이려했습니다. 아주 악랄했습니다. 행9:1, 2을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가 다메섹까지 가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먼데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겠다는 짓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그 곳으로 피난 가 있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극악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각 집을 수색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처소를 병사들을 동원하여 남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가두고, 심문을 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옛사람 모습입니다. 이렇듯 난폭하고 이렇듯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 뒤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180도로 확 변하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고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바울이 옛 모습을 그대로 숨김없이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핍박이 있을 때에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그 핍박은 뒤를 이어 예수 믿는 사람이 줄줄이 체포당합니다.
결국 그들이 이 핍박을 피하여 각지로 흩어집니다. 1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만 남고는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사도들만 용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여러분, 직접 신앙과 간접 신앙-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본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분명히 보고 알았기에 당장에 죽는다 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들어서 믿는 신앙은 간접적인 신앙입니다. 간접적으로 믿는 신앙이기에 박해가 따르자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직접 신앙을 가진 자와 체험한 자로부터 들어서 믿는 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직접적인 신앙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지식에 체험이 동반된 신앙이어야 힘이 있습니다. 직접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용기가 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 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은, 즉 도망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박해로 말미암아 재산과 가족을 잃어버린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박해 때문에 도망 간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은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남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책임지고 사도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4 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늘 본문에 나타 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뵈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박해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박해는 있습니다. 의로운 일에는 핍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의인에게 핍박이 있고, 교회에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그 동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과 같은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는가 하면, 또 악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를 통하여, 느브갓네살 왕을 통하여 ....... 이렇듯 좋지 못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보십시오.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흩어졌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버리게 되었다는 뜻도 있지만,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에 흩어졌다는 것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고난 속으로 이방세계 속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지만, 사마리아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생각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이 흩어짐이라고 하는 고난에는 선한 일로 그 동기를 안전히 바꾸어 버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실패한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한 쪽 문이 닫힐 때에는, 다른 한 쪽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내가 하고 싶었던 대로 안 되었습니다. 시미지어는 내가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갔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가고 싶지 않는 길을 마지못해 갔고, 원치 않는 사마리아에 왔습니다. 사마리아로 와보니 이제는 농사할 것도 없고, 집에 두고 있어 도둑맞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나아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 현실 속에 있어야 하느냐를 깨닫게 될 때에, 그 사건은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 태원 선교사님의 감옥 생활의 간증을 들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감옥에 들어갔으나, 감옥에서 시위원이나 저명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박 동성 집사님도 이번에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 현실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던져졌습니다. 이 현실을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 현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읍시다.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감옥은 이제 ???의 선교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생애의 존재 의미를 여기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자원하여 받아들이고, 주어진 고난이라고 하는 이 사건을 이제는 가슴을 열고 하늘을 우러르며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현실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보람된 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저들이 핍박으로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던 사건입니다. 정든 고향, 문전옥답을 떠난다는 것은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 현실 속에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남기고 가실까요?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유언하신, 지상명령의 말씀일 것입니다. 이 지상명령, 유언은 예수님 우리에게 항상 하고 싶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이 명령에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며 이루어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