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7-53 | 김남수 목사]
광야 교회는 성경에 오늘 본문 38절에 단 한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광야교회가 의미상으로는 성경 어디에나 있는 단어이지만, 딱 집어 광야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성경 오늘 본문에 딱 한번 뿐입니다. 스데반은 구약 성경을 지금 교회론적 입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라고 한마디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야”라는 말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나라에는 광야라고 할 만한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KBS TV 방송을 보는데 기자가 팔레스타인 광야를 취재해 방영하는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소금과 모래로 덮여 있고 무서운 짐승들과 뱀들이나 전갈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사해 바다 밑이었는데 융기되어 광야가 된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 입니다, 스데반이 설명하고 있는 이 광야 교회는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장에서 스데반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 들여 가지고 광야 교회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요,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것이요,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노정입니다. 광야는 이 광야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 교회에 대하여 구원론적이자 교회론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0:1, 2절에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바다의 세례를 말합니다. 먼저,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이라는 것은 일단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시적 구원입니다. 과거로부터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종말론적 즉 천국으로 올라가는 상징적 구원입니다. 광야에서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시험에 빠졌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므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험을 이김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에 굳게 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받았다,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 받았다-애굽에서 나왔다. 즉 중생했다. 구원을 받으리라-천국에 들어간다. 즉 영화를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라-예수님을 닮아 성장되어 가라. 성화를 의미합니다. 삼차원의 구원이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애굽은 곧 노예생활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죄와 우상의 노예가 되어서, 아무런 자유가 없이 죽을 고생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입니다. 에굽에서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힘으로 구원할 수 없는 참으로 무서운 노예 생활에 붙들려 있습니다. 지금 보면, 이 세상에는 나쁜 취미와 성격, 못된 생각과 정욕에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심령이 많습니다. 죄와 사망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굽은 완전히 버려진 죄악 세상을 의미(상징)합니다. 그리고 광야는 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가나안 땅은 완전히 자유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영광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 광야, 가나안-이렇게 세 공간을 상징으로 해서 우리에게 구원론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나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봅시다. 몸은 나왔는네, 정작 마음이 출애굽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습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도 보면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가운데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집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TV가 내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하고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설교를 듣는데 이 말씀은 꼭 남편이 들어야 하는 말씀인데 하면서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딴 데 있습니다. 여러분 몸만 여기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몸만 가지고 자기를 옮겨 놓았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오기는 했지만 온전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교회입니다. 아주 심오한 깊은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얼마나 극적인 사건입니까? 얼마나 굉장합니까?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모세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져 애굽에서 틀림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출애굽하지 않았습니다.
I. 광야 교회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진짜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광야 교회를 보게 됩니다. 그 교회 안에서 되어 진 일들을 보십시오. 39절에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저들이 모세를 거역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 교회의 믿음은-
먼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모세를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모세의 말을 거역했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 예표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것의 예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며 따르면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모세냐? 아론도 있는데, 말들 하다가......”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지 않았습니까? 내가 모세를 지명하였는데 너희가 왜 딴소리를 하느냐, 그 말씀입니다. 나는 모세를 통하여 너희들과 이야기 한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인도를,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부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 교회에서 저들이 범했던 죄입니다.
저들이 광야교회에서 범죄한 죄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원망 죄입니다. 고전10:5에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저들이 모세를 거역하고 원망하는 죄를 범하므로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능력을 믿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10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만이 죄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출애굽한 뒤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죄가 더 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범한 죄는 살인죄. 강간죄. 거짓말하는 죄입니다. 그러나 특히 믿는 사람들만이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망죄입니다. 원망죄가 죄가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망 죄야 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일단 일차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능력에 대한 완전한 반항이었습니다.
세 번째 죄가 39절에 나옵니다.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저들의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였습니다. 현재 고난이 조금 있다고, 애굽을 다시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고난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훈련이었습니다. 목적이 있어서 고통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하던지 그 고난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과 교과과정을 가지고 저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매는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감당치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불평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까지 하는 무리까지 생겨났습니다. 비록 노예 생활이지만 배는 곯지 않고 살았는데,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구원 받아 놓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죄입니다.
그 뿐입니까? 40절에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 저들은 아론을 충동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게 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한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출32:4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금송아지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죄입니다. 하나님이외의 다른 것이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찾고, 그것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참으셨지만, 자신을 우상화 해버린 그들의 작태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자신을 우상화하여 섬기는데 이르러서는 그 성전까지 헐어버릴 정도로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고, 그것을 때려 부수시고, 땅이 꺼져 이스라엘 백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죄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죄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반항하는 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광야 교회가 무엇입니까? 광야 생활 40년 동안 무엇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까? 정탐한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한 정탐꾼들이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다시 돌이키십니다. 요단강까지 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저들은 다시 광야로 후퇴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40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저들의 믿음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에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훈련 장소입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저들의 정신에 박혀 있는 애굽적인 것을, 애굽에서 때 묻은 성격과 잠재의식, 저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종교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을 씻어 버리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그거의 상징적인 한 예가 모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신을 벗으라”는 것은 “과거를 깨끗이 씻어라”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할 때에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면서 “이 패역한......”하고 소리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아직도 애굽 사람을 때려죽일 때의 분노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람 하나 바로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하나 바로 잡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문화 인류학에서 말하기를 문화 하나가 바뀌는 데는 공교롭게도 4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죄를 지적해 주면 반항을 합니다. 자신의 문제도 문제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40년 주기로 문화가 돌아 간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애굽적인 것을 씻어버리기 위해서 광야가 필요했습니다. 이 광야 교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 광야에서 저 미래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천국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웬만하면 이 광야에 정착하려 했습니다. 농사짓고 정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막으셨습니다. “농사를 짓지 말라- 내가 만나를 주마. 우물을 파지 말라-내가 반석에서 물을 먹여 주마”하시면서 40 년 동안을 그대로 광야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저들을 요단강 건너에 있는 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사모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기 때문에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어렵고 고통스러워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국지향적인 의식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야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광야에 머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갈 곳은 가나안 땅이다. 요단강 건너에 있는 가나안이 너희가 가야 할 곳이라고 저들로 계속 가나안을 지향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로 광야에서 그 모진 고생을 겪게 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광야 교회는 하늘나라 백성의 자질을 미리 훈련시키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저들에게 미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몸에 익히도록, 생활화 하도록, 체질화 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광야 교회에서 이것을 훈련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서는 저들로 증거 장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 성전을 짓게 함으로 임마누엘 신앙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증거 장막을 지어라, 법궤를 가져다 놓으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상징으로 여기에 성전을 지으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안심하라 원수가 쳐들어 와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흉년이 들어도, 질병이 생겨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을 확고히 보여주기 위하여 저들로 광야 한 가운데에 성막을 짓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예배당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아무 두려움 없이 당신의 지시를 따르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강퍅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출32:9에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이 모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광야 교회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훈련시키는 현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훈련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부정을 하고, 얼마나 깨끗하게 출애굽을 했습니까? 우리의 심령은 하나의 교회입니다. 마음의 성전이 하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아직도 애굽적인 요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때로는 질병을, 때로는 실패를, 때로는 고통을 내리십니다. 애굽적인 요소를 깨끗이 지우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지향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오늘도 광야 훈련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야 교회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