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6-38ㅣ김남수 목사]
지난 주일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한 고별설교의, 지난 날 자신의 에베소에서의 회상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해서 말씀드린 후 설교의 나머지 부분을 오늘은 계속해서 2. 장로들에게 부탁하면서 한 말씀(행 20:28~31)과, 3. 미래를 주께 의탁한 말씀(32~35)과, 4. 기도와 눈물로 결별한 사실(36~38)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에베소에서의 자신의 선교 활동의 회상(26~27)
27, 27절에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음이라” 바울은 복음전도 사역에 성실하지 않은 점이 없었다고 회고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 말은 결코 복음전도에 태만한 적이 없이, 오직 복음에 대한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의 씨앗을 심었으므로,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은 복음을 들은 그들 장로들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인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리낌 없이 다 전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피로 부터 자신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거리낌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거리낌이 없이 -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어디에를 가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주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의 충만한 사역인데, 어째서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었느냐 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핍박이 없어야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사도들로부터 오늘 2000년 동안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핍박이 있습니다.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핍박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핍박 속에서 전도자가 강해집니다. 핍박 가운데서 믿음이 강해집니다. 또한 핍박이 있는 중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해집니다. 핍박당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하고 얼마나 생명을 바치는지, 나아가서는 부활의 진리성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믿기에 죽기를 개의치 않습니다. 설교를 웅변적으로 잘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핍박당하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저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핍박 속에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 속에서 당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핍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간계도 있고, 물리적인 것도 있고, 교리적인 것, 신앙적인 것도 있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핍박이 있었으나, 이 모든 핍박 중에서 사도바울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약해지던가, 혹은 그 생각이 무너지든가, 혹은 조금이라도 위축이 된다면, 복음을 전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무슨 인간적인 욕망에 있었다거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의 인간적인 나약성을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외적인 핍박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나약성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할 때는 ‘그렇지. 비난 받을 만하지’하고 생각합니다. 또 누가 나를 비방하면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는 게 잘못된 거지’하고 자기 부족함을 생각해요.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하면서 나약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나약성, 자기 부족, 이런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어요. 누구든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기 나약성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해요 그래도 복음 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확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못해요.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꺼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극복하고 복음을 전했노라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은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말씀합니다. 핍박을 당해도 깨끗하다.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지만 깨끗하다. 바울은 에스겔 3장 본문을 생각하면서 말씀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3:17~20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가 아니라, 만일 내가 그의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핏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여기 악한 사람이 있어요. 망할 죄가 있어서 망하는 것입니다마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십니다. 가서 전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전했는데,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저들은 자기들의 죄로 죽으려니와 너는 무방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저들이 복음을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면, 망하게 되었다면, 저들은 자기 죄로 그렇게 되었지만, 그 피 값은 네 손에서 찾으리라. 네가 벌을 면할 수 없으리라 하십니다. 그래요.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내버려두는 것은 살인이나 같습니다. 간접적인 살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깨끗하다”라고. 왜요? 3년 동안 에베소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노라. 에베소가 망하더라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깨끗하다. - 그 말씀입니다. 그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내 친척이든, 내 부모든, 내 이웃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아는 사람에게 다 복음을 전하고 최선을 다하세요. 그랬는데도 망하는 것이야 각자의 죄지요. 알바 없어요. 그러나 나는 깨끗한 것입니다.
Ⅱ. 에베소 장로들에게 부탁한 말씀(28~31)
28, 29절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바울은 장로들에게 사명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 맡은 업무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양떼의 감독, 즉 목자로 삼았다면 자신들의 맡겨진 임무에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로들에게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또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삼가다”라는 말은 “전력하다”, “관심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바르게 처신해야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세우셔서 양 무리의 감독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여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양 무리의 모범이 되게 하고 언행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주의 종을 감독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시대는 장로나 감독자의 사이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에서도 장로나 감독, 그리고 목자와 같은 용어가 구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에베소 장로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어 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떠나면 에베소 교회가 외적으로는 박해에 시달리고, 내적으로 배교의 세력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빠질 것을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교회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회중 즉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형성은 곧 하나님의 은혜며 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되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엡 2:19,20). 요즘 현대교회도 에베소교회가 당면한 문제 못지않게 신천지와 같은 이단 사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몇일 전에 신천지가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함으로 교통에 혼잡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의 사명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생명으로 인도하느냐”아니면, ‘사망으로 인도하느냐’하는 중대한 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 지도자들은 성령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성령의 도움과 인도를 요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친다는 청지기적인 목회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30, 31절에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우리 주변에는 양떼를 약탈하려는 이리들의 위험성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지만, 교회 내의 잘못된 지도자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빠뜨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실제로 에베소교회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바울의 목회 서신에(딤전 1:19, 20, 4:1~5)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과 같이, 이단들의 분열, 책동자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로들에게 에베소교회에 어떤 이리도 교회 안에 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치리를 위임하며 권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가 에베소교회에서 어떻게 하였던가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따라서 할 모범으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눈물로써 그들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는 연민의 눈물로써 그들을 훈계하였습니다.
Ⅲ. 미래를 주께 의탁한 말씀(32~35)
32절에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여러분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기에 바울 사도의 특별한 말씀신학이 있습니다.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전하지만, 내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말씀이 나를 붙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물을 한번 예로 생각해 보십시다. 깊은 물에 들어가면 물이 무릎까지 왔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해요. 내가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도 있고, 헤엄칠 수도 있어요. 가슴까지 와도 헤엄칠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제는 내가 허우적거림이 별 의미가 없어요. 겨우 떠 있을 정도이고, 물이 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이와 같이 내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느 선을 넘으면 이젠 말씀이 나를 지배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내 생각, 내 운명, 내 의지를 다 지배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능히 든든히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말씀을 전하라. 말씀만 순종하라. 그러면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하게 세워 줄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있게 하리라 -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말씀 따라 끝까지 가보면,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33-34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세속적인 치부를 위한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에베소의 기독교 신앙인들은 많은 돈과 금속과 값비싼 가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급 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사치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거짓사도들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갈망하였고, 세상에서 유명한 자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한 자리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전도하고 주의 일을 행할 때에 다른 사람의 물질적인 도움을 조금도 바라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스러운 짐을 지워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이 물질적인 포상을 바라지 않고 행해야 함을 상기시키면서, 또 다시 자신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35절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범사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전후 문맥을 보면 탐심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은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고, 사람의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장로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하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이 말씀은 복음서에 직접 쓰여 있지 않지만 그 정신은 여러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눅 6:38.등 )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주는 것으로써,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한 가지라도 더 주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줄 때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으면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줄 때에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베푸는 자만이 자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주는 자로 남고 싶다. 나는 스스로 수고하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순수한 희생과 수고가 조금이라도 어떤 일로 인해서 비난을 받든지 손해를 입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라, 양떼를 위하여 삼가고, 자기를 위해서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장로들을 앞에 놓고 하는 말씀입니다. 28절에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교회는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감독자도 성령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교회가 있고, 감독이 있고,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학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고로 삼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그 피로 사신 교회 입니다.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세운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그간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잘못되었어요. 얼마가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사람이 많이 모여서 교제한다고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서 교회,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교회,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 성령이 역사하셔서 교회입니다. 성령이 세우셔서 감독자요, 장로라는 말씀입니다.
IV. 기도와 눈물로 결별한 사실(36-38절)
36-38절에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은 말을 마치고 난 후,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과 함께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연합된 기도요, 경건의 기도요, 사랑의 기도요, 작별의 기도였습니다. 목자와 양 무리들 사이에 사랑이 넘치는 진정한 감동적인 장면이 밀레도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서로 깊은 애정과 슬픔을 느끼며 작별을 고하고, 바울과 그 일행은 밀레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쳐, 순교지인 로마로 가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장로들은 바울을 배에까지 전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