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1-6 | 김남수 목사]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불러서 쓰심으로 능력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생활화했으며, 유무상통으로 나타났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초대교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일 뿐입니다. 초대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 가룟 유다 문제가 문제꺼리였는데, 다만 그것을 어떻게 잘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과제일 뿐입니다.
본문에 원망이 문제로 드러나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건 히브리파 유대인이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이 다릅니다. 문화적 배경으로 결국 충돌이 생긴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해외에 나가서 살면서 당시는 로마정치 지배 하에서 살면서, 문화적으로는 헬라문화가 지배하였기 때문에 언어적으로는 헬라 문화권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 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해외에 나가지 않고 본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며 사는 정통적으로 유대사람들의 율법이 엄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렇듯 같은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하여 은혜 가운데서 살면서도 두 문화권은 부딪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이 생기는 문제는 구제 문제입니다. 구제 사업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본문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원래 유대인들은 금요일이 되면 모금을 해서 이것을 저녁에 나누어 줍니다. 이렇듯 모금한 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 주는 관습이 있는데, 구제를 매일 했다고 합니다. 그 날에 필요한 것만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과부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과부는 디모데전서를 보면 그 의미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세상 연락 같은 것에 미련이 없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친척이 없어야 하고, 셋째는 한 번만 시집을 갔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봉사정신이 있어서 남은 생애를 오로지 봉사하는데 바치겠다는 사람으로 60세를 넘어야 합니다. 젊으면 또 시집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과부들은 교회명부에 올려서 매일 구제를 합니다. 이런 과부들은 교회에서 생활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 과부들은 온전히 교회에 봉사하고 기도하는 일만 합니다. 이렇게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그들을 구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명부에 올려놓고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우선이 되었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구제문제는 언제나 원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구제문제로 말미암은 원망과 불평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는가 봅시다.
첫째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교회는 기능이 전도, 봉사, 친교인데, 첫째가 전도라고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구제하기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전도를 뒷전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맨 먼저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구제 문제로 시끄러워 졌을 때 열 두 사도가 제자들을 불러 놓고 뭐라고 말씀합니까? 2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먼저가 전도인데 구제하는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쓰게 되느냐 말씀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라고 해석을 내리게 됩니다.
두 번째는 과감하게 양보를 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불평의 해결책으로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그런데 일곱 집사의 이름을 자세히 보면 전부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평하므로 사도들은“당신들이 구제하라, 당신들이 분배하는 것을 책임져라”하고 책임자로 헬라파 유대인들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양보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양보하지 않으려 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구제는 사도들의 책임 하에 있는 일이었지마는 과감히 양보합니다.
세 번째 사도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해 오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담시킵니다.
일임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 혼자 다 맡아서 하려니까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기능적입니다. 난 이것을 하고, 당신은 저것을 하시오. 난 전도를 하고 당신은 구제를 하시오 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맡길 수 있을 때에,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맡겨서 해결하면 능률적이 됩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저 일은 동시에 못하니까요. 그러나 여럿이 함께 하면 일시에 아주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봉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지 혼자 다하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를 주셨기에 나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을 맡아서 그 일만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전체 합의로 일을 처리하는데 있습니다.
합의하는데서 새 질서가 창출됩니다.
다섯 번째 모든 것을 신앙 안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토대위에 행하면서 집사를 세웁니다. 집사의 자격은 3절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집사를 저들은 먼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세웁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문제가 시끄러워 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높은 학식과 지위가 있다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는 마음은“무엇보다도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렘17:9)이라고 합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은 마귀가 지배해 왔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그 마음과 성품을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받은 증거를 가진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는 사람은 안 됩니다. 하자가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 사회적으로 칭찬받고 신뢰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들은 이러한 사람을 세워서 구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6절에 일곱 집사를 택하여“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 하니라.”
일곱 집사를 택하여 기도하고 안수한 뒤에 집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택한 사람들에게 일임하는 것입니다. 위임하고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직분을 맡은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안수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옵소서.”하고 거룩한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수입니다. 사도들이 안수기도를 해서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하나의 임직식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큰 교회든 적은 교회든 오늘날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입니다. 해결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먼저 우선순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전하는 일이 우선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이것이 손해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교제나 봉사 등 다른 것이 주목적이 될 때, 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성장 학에서 전도를 제쳐놓고, 교육이니 봉사니 친교니 하는 것에 열중하다보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예배와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친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친교 역시 말씀 다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주고자 하는 마음, 봉사하고픈 마음만 있으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교회 부흥을 위하여,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바쳐나갈 때에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능률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