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2-16ㅣ김남수 목사]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감정으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유욕이 없어지고, 유무상통하며,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 필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므로 핍박이 있었지만, 이 핍박이 오히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성도들끼리는 서로 열심히 사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하고 든든하게 세워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에 비치 바는, 제목 말 그대로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사도의 행적인데 사도들의 권능과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3장에 보면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거기에 따른 유대주의와 충돌이 일어났고, 4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거쳐, 5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유대주의와 교회와의 계속적인 충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권세와 권위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5:12에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이 권세가 어디로부터 주어졌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선택하여 임명하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뵈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권위의 출처입니다.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표적”이란 말이 없습니다. “이적”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적은 헬라어로 “테라스” 이며 영어로는 wonder-놀라운 사건, 깜짝 놀랄만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가면 “표적”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아”, 영어로는 “sign”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이적”과 “표적”을 다 사용합니다. “이적”과 “표적”이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라, 다 같은 한 사건인데 “표적”이라는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시고, 물위를 걸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이것을 보고 “아! 굉장하구나.”놀랬습니다. 그것만 생각했어요. 그 “이적”이 담고 있는 말씀의 의미는 깨닫지 못했어요. 그 속에 있는 말씀의 의미는 사도행전에 와서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일어나는 이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닙니다. “표적”과 “이적”입니다. 같은 한 사건을 놓고 한 이야기입니다. 불치의 환자가 일어났어요. 죽을 사람이 살아났어요. 병 고침 받는 것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병 고침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 고침 받는 사건,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계시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암 병이 낫고, 불치의 환자가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나타나셨다. 지금 이 사건 속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 이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래서 표적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이적이요 표적입니다. 이적하면 병이 낫는 것만 생각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초대교인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도 이적이요 표적입니다. 성령을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둔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도움을 받아 체험하고도, 또 돌아서 몇 주 지나면 비난합니다. 두려움과 떨리는 일이니 돌이키십시오. 표적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여 도움을 받았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운 위임된 권세가 나타났다는 표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표적입니다. “이적”과 “표적”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고 체험하게 됐다는 것, 성령이 성도를 주관하시고 함께 하시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왜 성령을 속였느냐 - 꼼짝 못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사도와 함께 하시고, 그 사도들을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우시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표적”입니다.
초대교회는 능력과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행5:15, 16에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당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구원의 역사의 확실함과, 기사와 병 고치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지, 베드로는 일일이 안수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에게 안수 기도받기가 힘 들자,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병자들을 눕혀 놓았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고침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이 있는 자는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베드로의 그림자에 능력이 있어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다는 백성들의 믿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똑같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 병 고치는 능력이 복음전도에 크게 이바지 했습니다.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병든 사람입니다. 본 절은 이 사람들이 “다 나음을 얻으니라”합니다. 병자를 다 고쳤어요. 참으로 부러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 나음을 얻으니라” 귀신들린 사람이 오면 깨끗해지고, 병자가 오면 낫습니다. 행19: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입니다. 그 권위가 대단합니다.
초대교회는“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본문에 보면“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모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모임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모임으로써 기도하고, 모임으로써 저들은 한 마음으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로 부터 성경을 배우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모였습니다. 모이는 데에 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오늘날 세계적으로 잘 모이는 교회입니다. 열심히 모입니다. 예봄 교회 교인들도 열심히 모이십시다.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훈련받읍시다. 모이는데 힘이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 보니 “마음을 같이 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샛말로 만장일치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능 앞에 모두가 하나같이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하나이지,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나라 사람, 여러 문화의 사람이 모였어요. 여러 지방, 여러 형태의 사람이 모였지만 상관이 없습니다. 다 같이 사도를 중심해서 하나 되는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방적으로, 각각 나누어져,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직적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어려운 교회를 가만히 보면, 하나가 안 되어 세상 신분적으로 지방적으로 세상 적으로 제 각각이에요. 사도 바울은 엡4:3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13절을 보면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그“나머지”라고 하는 말은 교인이 아닌 사람을 말합니다. 교인이 아닌 사람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 또 하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 아예 안 믿기로 굳어진 사람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본문은 “나머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들의 권세가 워낙 높으니까, 이 높은 권세 앞에 잠시 핍박 자가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어져가는 판인데 제사장인들 겁이 안 나겠습니까? 감히 누가 상종하겠어요? 초대 교회에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그러나 이런 일은 오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핍박이 생깁니다.
초대교회는 이렇듯 권세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권세는 세상적인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다시 사도들을 믿는 믿음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 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쓰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고, 굳건히 서 가고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