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26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말씀은 나며서부터 앉은뱅이 된 40세 된 사람이 구걸을 위하여 성전 미문에 앉아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므로 성전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극적이고 놀라운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기적을 행하는가? 또한 어떻게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는가? 예수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 역사가 일어날 때 설교자가 취할 자세 등 여러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행 3장은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1-10절은 앉은 뱅이가 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둘째, 11-26절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모인 사람들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이며, 셋째, 19-26절은 설교의 결론부분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죄 없이 함을 받으면 주님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니, 회개하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I.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행3:1-10)
본문 1절은 “제 9시 기도시간에”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제 9시는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하루에 3번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 이렇게 3번 기도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한번 만은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됩니다. 제 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는데, 그때에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기 위하여 앉아있습니다. 행4:22에 보면 그는 40세쯤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문제는 40년 동안 얻어먹고 살다 보니 이 사람은 얻어먹는 체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들어섭니다. 그들을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밉니다. 적선해 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모습을 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처음 그를 보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전에도 늘 본 똑같은 앉은뱅이지만, 오늘 베드로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를 본 순간 불쌍히 여겨질뿐더러,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작동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작동하자, 그 사람을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합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이렇게 눈과 눈이 마주칠 때에 베드로가 말문을 엽니다. 베드로가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병자들을 고치라고 명령하셨으니, 제자들도 마땅히 고쳐야지요. 때로 우리 마음속에 환자를 볼 때,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할 때,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손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내 입을 통하여 역사하실 뿐,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눈이 서로 마주치는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합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저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절) “우리를 보라”했으니, 당연히 무엇을 주려나 하고 바라볼 수밖에요. 돈을 줄 것인가, 금덩이를 줄 것인가, 기대감을 가지고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말이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이 말을 듣는 순간 앉은뱅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실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어서 아주 의외의 말이 나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 손으로 잡아 일으킵니다.(6절) 그러자 이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그 병자 안에 치유의 능력이 들어가 믿음이 생기고, 그는 고침 받고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말은 대단한 믿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순간 베드로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지금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 익두 목사님이 어느 날 앉은뱅이를 고치려 할 때, 먼저 누가 보나 안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김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뭐요?”라고 하더랍니다. 아마 김 익두 목사님에게 성령께서 믿음과 감동을 주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생각과 인간적인 믿음으로 명령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김 익두 목사님은 자신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며칠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결국 마침내 그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담대히 명령합니다. 성령께서 주신 선물 은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앉은뱅이 마음에도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가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을 때, 나는 40 년 동안 앉은뱅이요 하고 일어나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기운을 내어 일어나려고 애썼습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믿음입니다.성령께서 앉은뱅이 에게도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언제 베드로를 보기나 했습니까? 처음 만난 베드로로 부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는 명령을 듣고, 그도 내면에서 일어날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얻기 위하여, 그는 지금까지 가졌던 경험과 고정관념, 자기 집착, 이전 것을 일시에 잊어버렸는지 모릅니다. “일어나라”하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았다면 “일어나라”했을 때, “일어나려고 하나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순종할 마음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자신은 기계적으로 공짜로 낳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희망 사항으로 남을 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인이 믿어야 합니다.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는 나면서 지금까지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은혜에 대하여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은혜의 역사가 왔다 갔다 할 뿐,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늘 이 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합니다. 원문을 보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향하여 걸으라.”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향하여, 즉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앉은뱅이 마음에도 믿음이 생기고, 내면에도 일어날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계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뛰며,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앉은뱅이를 본 사람들이, 그가 걷고 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으로 40년 만에 걷게 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나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적의 묵적이요 구원의 결과입니다.
II. 모인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함(행3:11-26)
이 광경을 보고 11절애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40년 된 걸인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도 앉은뱅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이런 기적이 이루어졌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서적 해석이 영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고 설교합니다. 설교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보느냐” 왜 이상하게 보느냐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병자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교회와 함께 하시고, 믿는 자와 함께하시고, 베드로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일을, 오늘날은 교회 즉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믿는 자를 통해 계속하고 계십니다. - 이것을 예수님의 천상사역이라 합니다. 그 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은 이상히 여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적과 이적을 행하는 자와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12절에“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어떤 기적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떤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사람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붙들어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설영 내가 능력을 행하는 입장에 섰다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중요한 말을 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적과 이적을 행하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일 뿐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선망의 눈으로 쳐다 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왜 우리를 쳐다보느냐? 내가 한 일이 아니니 나를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베드로의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 인기, 교만이 죽어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존경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존경을 자기가 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자기가 그 존경을 취한다면 도둑놈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존경을 자기가 취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한 사람과 같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베드로의 훌륭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는 어찌하여 우리를 주목하느냐”하고 전적으로 영광을 존경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존경을 사양하고, 그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설교자는 자기 욕심이나 명예, 인기나 교만을 버린 올바른 신자가 되고야,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듣는 청중을 영적으로 잘못되고 병들게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첫째 이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40년 된 앉은뱅이가 걷는 이적으로 마음이 열린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담대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루어 놓으신 복음을 전합니다. 14, 15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빌라도나 로마 군인, 그 당시 사람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나 자신, 우리 개개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성, 연계성을 이해하므로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로 할 때,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주제입니다.
둘째는 베드로는 이 기적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15절에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씻을 수 없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놀라운 순간이십니다. 새 생명, 영생을 주시는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놀라운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 베드로는 이 기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 이 사건 속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내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현재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 사건이 오늘 여기에 나타나,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좀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에 대한 문제입니다.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그 이름이 낫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분, 그 존재를 지칭합니다. “아무개”라고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대답하고 그 사람이 거기에 옵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그 존재 소유 능력 권세를 나타냅니다.그 이름을 부름과 함께 그 이름의 존재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곳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병 고침 받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2:21 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3:6 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4:10 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4:30 절에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곧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절대로 주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당이 주문을 외듯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 이름”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부를 때에 “예수님의 이름”즉 “예수님 자신이”현장에 나타나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의 의미는 예수님을 통하여 난 믿음이란 뜻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좀 더 깊이 있게 해석하면, “예수 영이 역사하여 난 믿음”이 됩니다. 아무나 병자를 보고 소리 지른다고 낫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예수의 영이 마음속에 역사하여 감동하시므로 엄청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나 욕망이나 희망도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여 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종종 경험합니다. 환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마음이 싸늘할 때가 있습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 감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대하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는 뜨거워지면서 믿음이 뜨겁게 솟아오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응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습니다.”하고 소리 지른다고 응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작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소리 지를 분이 있습니까? 장차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매일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믿음, 성령께서 그 순간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담대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완전히 붙드시고 도구로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믿음, 예수님으로 난 믿음, 성령이 역사하여 믿음이 부어질 때, “그 이름을 의지하여 이름을 사용하면, 그 이름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상관없이 예수께서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III. 결론 부분으로 회개하라는 권면 (3:17-26)
오늘 베드로의 설교 후반부는 설교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19절에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하라는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의 문제입니다. 이 병 고침 받는 이적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적을 구하십니까? 이적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고 하는 이적을 보았다면, 우리는 이적 앞에서 경건한 회개의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고 계시기에, 이제 우리는 그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큰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17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라고 말씀하며 18-26절까지 쭉 말씀하고, 26절에“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회개는 자기의 죄악 된 생활을 벗어버리고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새로운 방향으로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죄 없이 함을 받으라.”본문 말씀대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문제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회개하여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면 “새롭게 되는 날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는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회개한 사람은 죄의 형벌이나 죄책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유쾌하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이나 명예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이 유쾌한 심령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유쾌하게 되는 맛을 못 본 사람은 아직도 덜 회개했기 때문에 유쾌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문제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유쾌하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죄로 부터, 벗어난 죄 사함 받은 심령을 의미합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났기에 현재는 의미 있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약속된 것으로 봅니다. 그래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쾌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얻어집니다. 본문은 “새롭고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오면, 상상도 못했던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내가 만드는 심리적 현상이거나, 인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께 로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