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42-47ㅣ김남수 목사]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신약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란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모셔 들여 예수님의 몸에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탄생한 초대교회 즉 원형교회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A. 먼저,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는가?
오순절에 120 문도가 성령 충만을 받고 모두가 방언을 하며, 그 곳에 모인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각각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 나라 큰일을 말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각각 자기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일, 즉 구원의 소식을 듣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도 하고 소동하는 군중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성령강림 사건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설교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걸 깨닫고, 자신들이 메시아를 죽인 죄인인지라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하며 부르짖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돌이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오순절에 예수 믿는 사람이 3000 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오순절에 이렇게 신약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레23:15-17을 보면 구약의 오순절에 떡 두 덩이를 흔들어 요제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떡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하며, 흔들어 요제로 드리는 제사는 무엇을 예표 하는가 하면, 신약시대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탄생할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전하자, 그 곳에 보인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아 구약 그림자의 실체인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전도하여 구원 받아 사람이 모이면 교회가 개척이 되고, 기존교회는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참교회의 모델을 생각하면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초대교회 오순절교회를 떠 올립니다. 처음 오순절에 탄생한 오순절교회 즉 초대교회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사모하고 본받고자 한 교회원형교회요, 모델교회인 참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오셔서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생명이 되시며 믿는 사람 안에 살아계신 것입니다. Living Christ in church입니다.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제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잘못 생각하므로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는 좋은 말씀이나 철학 윤리를 배우려고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자 나옵니다. 영생을 얻고자 나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들과 동행하고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식하고 체험하고자 나오는 곳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주시므로 성령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명력이 역사하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가 됩니다.
B. 다음은 원형교회의 특성을 봅시다.
행2:42-47절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원형교회의 생활의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초대교회의 특징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행2:42-47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위의 말씀은 11가지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같이 상고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배우는 교회”입니다.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복수이고, “가르침”은 단수입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교훈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이 각각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에 주신 사명, 즉 은사를 따라 같은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교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면 배우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말은 무성하지만 삶에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 충만했지만 열심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쫓아 그리스도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음식이든지 그야말로 맛있게 잘 먹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여 배우고 듣고, 돌아서도 또 듣고 배우고 싶어 합니다. 말씀이 가슴에 와 닿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입맛이 좋고 소화가 잘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하는 것, 성경 읽는 것이 싫고, 자꾸 이유를 대면서 회피하고 안 배우려고 하면, 이단 사상의 독물을 먹었거나, 영적으로 건강치 못한 병든 심령인 줄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교회, 공부하는 교회가 참 교회, 초대교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주관적 체험에 객관적 교육이 합쳐진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아는 체하고 판단하고 배우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제 고집대로 합니다. 팀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팀을 이루고 무리 양을 이루며, 언제나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고 겸손히 배웁니다. 이와 같이 배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서로 이야기 할 때도 그렇습니다. 듣는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말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재미있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시나 강의 시,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앉아 꼬나보면서 듣는 것은 큰 실례가 됩니다. 무례한 행동인 것입니다. 너 이야기할 테면 해 보라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세 듣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열심히 듣습니다. 어찌 보면 듣는다기보다는 받아먹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누가 왔나 주위나 살피면서 듣는 체 하지만 실상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속으로는 딴전을 부리고 있고, 배우는 겸손한 자세가 아닙니다. 듣지 않기 때문에 고치지 않고 변화가 안 됩니다. 나중에 보면 듣지 않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속에 교만한 영이 가득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겸손했습니다. 겸손했기 때문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의를 집중하여 열심히 들었습니다. 사도들, 가르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갈릴리 어부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을 빌리면 불학무식한 사람들입니다. 불학무식한 어부들이 무엇을 제대로 가르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치는 말씀을 겸손히 받았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생애, 그 분의 교훈, 그 분의 말씀을 배우고자 모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경을 풀어 그리스도를 가르쳤기에 저들은 어부들 앞에 나와서 열심히 배운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겸손,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친교하는 교회”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코이노니아, 교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표시하는 단어입니다. “서로 교제하며”여기에 형제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모두가 형제자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우리는 모두가 다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요, 형제애로 모여 교제를 이룹니다. 여기는 계급도 차별도 있을 수 없고,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의 교제를 이루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세 째 “떡을 떼며” “ 집에서 떡을 떼며”초대교인들은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애찬과, 식 후에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애찬은 교회 성도들의 빈부차이로 여러 폐단을 가져왔기 때문에, 후에는 차차 분리되어 교회에서는 성찬식만 행했습니다. 이집 저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애찬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성전예배와 가정예배에서 초대교인들의 사랑이 넘치는 다정다감하고 친밀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전에 목동 상가교회에서와는 달리 주방에서 수고하는 최 윤아, 김 경옥 권사와 여러 권사님들, 여 집사님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애찬을 나누면서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먹는데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 충만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 받기 위해 기도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그 충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이웃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 기도합시다. 이초대교인들은 개인적으로든 단체적으로든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저들은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핍박을 이기기 위하여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영적 체험이 충만할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기도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다섯 번째 “두려움이 있는 교회”입니다.
43절에“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여기 말하는“두려움”은 믿음 안에 있는 신령한 두려움, 경건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사도들로 인한 영적권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니까 마음속에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두에게 저마다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사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를 보고 저들은 두려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있었습니다. 건강한 신앙, 좀 더 두려움이 있는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야 다치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나니” 초대교회는 표적과 기사가 있는 교회였음을 말씀합니다. 권능이 있었기에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불치의 병자가 고침 받고, 귀신들이 쫓겨 나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월없이 함부로 뒤에서 비난하고 머리를 굴리며 잔꾀를 부리면 되겠습니까? 목회자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됩니다. 표적과 기사가 중요합니다. 치유의 역사가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있고서야 교회가 교회됩니다. 영적으로 치유의 역사와 표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사와 표적하면 치유의 능력만을 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망하거나 죽는 것도 표적입니다. 헤롯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고, 마술사 엘루마는 바울이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을 대적하다가, 바울이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보지 못하리라” 저주를 하자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이 이를 보고 놀랍게 여겼습니다. 살리는 것만이 이적이 아닙니다. 죽고, 병들고, 망하는 것도 이적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자에게는표적과 기사를 행함으로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통합 측 윤OO 목사가 그렇게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잘된 것만 이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안되고 실패도 이적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면 회개하여 그 죄를 버리십시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바로잡게 하시기 위해서, 실패도 주시고, 질병도 주시고, 죽임도 주시는 것입니다. 자손의 앞길이 막힙니다. 이적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방자하게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적을 한 측면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의 부흥을 저해하는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이적을 나타내는 곳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 입니다.
일곱 번째 "서로 유무상통하고 나누는 교회" 입니다.
44, 45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초대교인들은 가정을 없애고 공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늘 같이 모여 살았으며, 물질을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통용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분배하여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 폐단이 생겨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핵심은 초대교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므로 이기심이 사라졌습니다.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사적으로 축재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을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성령 받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기에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의 필요가 보일 때 자원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먹고도 남을 만큼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여덟 번째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자주자주 열심히 모여 성령으로 예배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바쁜 오늘날 모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인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저들은 가정에 모이고, 일터에 모이고, 성전에 모이고 ...... 자주 모여서 교제하며 같이 기도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아홉 번째,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46절에“......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인들은 날마다 모여 음식을 같이 나눠먹고 기쁨이 넘치는 교제를 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 “기쁨”은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부귀영화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고 영생 얻는 기쁨이었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핍박이 있었지만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구원받는 감격, 성령 충만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열 번째 “감사와 찬양하는 교회”입니다.
저들은 서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리를 짓고 암투하며 서로 나누어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마귀의 충동질에 속은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찬양했습니다. 언젠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 와서도 노래를 부르는데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찬송이지만, 예수 안 믿는 그 사람 입장에서는 노래 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 와서도 노래를 부른다고 의아해 할 밖에요. 게다가 찬양의 가사를 가만히 보십시오. 기쁨과 소망을 찬양하는 가사가 많습니다. 장례식에 와서도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이 교인인 것입니다.
열한 번째, 마지막으로 “칭송받는 교회”입니다.
47절에“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어디에서건 어느때이건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칭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임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금까지 위의 열한 가지 특징을 가진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교회가 교회되면 날마다 부흥합니다.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 구원의 은혜를 더하겠다고 하십니까? 이렇듯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의 열한가지 특징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 특징가운데 50%만이라도 쫓을 수 있다면 우리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각 가정에, 하는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예봄교회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와 같은 온전한 참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 모두 한사람 한 사람이 초대 교회교인 같은 참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축복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