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7-41ㅣ김남수 목사]
120문도는 감람산에서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마가의 다락방으로 옮겨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이 이르매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하며, 또한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120 명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천하 각국으로부터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 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태어난 곳의 언어로, 즉 자기의 각 방언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희가 새 술에 취했다” 조롱도 하고, 어부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식한 복음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해 당황하고, 시끌벅적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열한사도와 같이 서서 여러분,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으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 오전 9시 쯤 되었으니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유대민족은 오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잖습니까? 이들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예언의 성취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셔서 지금 이 120명이 성령을 충만히 받아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름이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대신 우리의 죄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이시기 때문에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대속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죄가 없으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열한 번 이상 나타나 우리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40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나타나 보이시므로 부활하신 증거를 확실하게 남기시고, 감람산에서 500 여명이 보는 가운데 천사의 호의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셔서 자신의 대속의 사건을 아버지께 제시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속량을 완성하신 것을 보시고 만족해하시며,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이렇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이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말세에, 즉 신약시대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중보자가 되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와 그리스도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바로 자기 민족이 고대하고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이셨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이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이 마음, 이 부르짖음이 베드로 설교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순절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불과 50 일 밖에 안 된 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그들이 예수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외칩니다.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가 보통 죄입니까? 엄청나게 무서운 큰 죄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려“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가야바가 원흉입니다.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로마군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관계되어 있고, 예수님이 재판 받으실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사람들 중에 몇 명이 지금 군중들 중에 섞여있어 설교를 듣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메시아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거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화를 내면서“베드로 선생 말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소? 그런 끔찍한 소리 마시오.”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베드로 말을 인정하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이 반응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을 듣고, “그렇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은혜 가운데 있는 진실하고 겸손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지금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에 나와 권면을 받고, 마음에 찔림도 받고, 느낌도 받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바로 맺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가장 생명력 있는 설교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찔림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치유의 길을 찾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치유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이 물음 속에는“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대한 바른 반응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 대안을 제시합니다. 38절에“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대안을 듣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말”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37절)”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40절)” “이‘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41절)” 여기 나오는‘말’은 전부가 베드로의“말”로 베드로의 “설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고, 그 설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여기에 생명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와, 문제 해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함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기에, 구원과 성장이 있고, 문재 해결과 치유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아지고 마음에 찔릴 때에 바로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고 편집하면,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38-41절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구원 받는 길을 베드로는 설교에서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니아”인데 이것은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뉘우치거나 눈물이나 흘린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바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임시방편으로 돌이키는 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가던 사람이 완전히 생각을 돌이켜 바꾸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들면서 집을 떠나 멀리 간 탕자가 돌이켜 즉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회개입니다. “너희가 세상으로 기울어졌고 잘못 빠졌으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각 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셋째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합니다.
우선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예수 이름”의 의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예수 믿어서 해결되는 문제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최우선적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단연 죄 사함 받는 문제입니다. 회개하고 죄 문제가 해결되면 구원 치유 문제해결 등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구약제사 때 제물로 드리는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인데, 예수님이 그 실체입니다. 대 속죄제사 때 양 두 마리가 있는데, 아사셀을 위해 양 한 마리를 제비 뽑습니다. 아사셀을 위해 제비 뽑힌 양의 머리 위에 대 제사장이 손을 얹고 안수하므로 백성의 죄를 고합니다. 죄를 고한 후, 그 양은 그 죄를 대신 지고 사람이 없는 무인지경으로 끌고 가 버립니다. 그 양은 죄를 지고 멀리 가서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결국 죽음으로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영원히 우리 죄를 멀리 우리에게서 옮겨가 버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남은 또 한 마리의 양은 번제단의 네 뿔에 네 발을 묶고 목을 따 피를 콸콸 흘리며 죽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그 죄 값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그 죄값으로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 죄를 깨끗이 지워버리고 용서해 주셨음으로, 그 죄는 영원히 멀리 가 버렸기 때문에 그 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히 깨끗이 용서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죄는 영원히 깨끗하게 사함 받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합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약속의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39절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엡2:11-18)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얼마든지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란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는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교회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순서에 따라,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고 계시며, 앞으로 신약시대 전 기간 동안 성령을 계속 부어 주실 것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들면, 오순절 120문도는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며(요15:3),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었습니다(요17:8). 오순절에 120 명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약속의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교인들도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남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행8:4-7, 14).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사마리아 교인들에게 안수하매 저희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8:14-17). 에베소 교인들도 바울이 증거한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행19:2-5), 바울 사도가 안수하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행19:6-7). 이와 같이 예수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한 불신자(마귀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합니다.
구원이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으라.”합니다. 이것은 집단적 구원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3000명이 구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세례를 받으라. 를 강조합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세례의 근본적 의미는 공적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으므로, 나는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결혼식은 어떤 의미에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결혼식이 무엇입니까? 결혼식이 중요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결혼은 공개적으로 사회적인 계약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둘이서 사랑한다고 백 날 천 날 외쳐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이 여자는 이 남자의 아내요, 이 남자는 이 여자의 남편입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약속합니다. 공개적으로 결합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 교우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례 받으므로 그 시각부터 지상 교회의 정회원이 되고,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세례란“이미 예속되어 있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에 연합됨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란 큰 공동체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당의 당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공적으로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 세례를 받으면 족보에서 이름을 제하고, 가정에서 추방시키고, 그 사회에서도 추방당합니다. 이와 같이 세례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례가 이렇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하나님 앞으로 갈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 받으므로 믿음이 생기고, 세례 받으므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예수님을 오래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믿음이 생길 때까지 세례를 안 받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결혼식을 하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결혼식을 하고 살아야지요.” 그러면 “세례도 그와 같습니다. 먼저 세례 받고 나서 계속 예수를 믿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을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그 즉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고 난 뒤에 믿음이 훨씬 자라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렇듯 세례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여러분이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되고, 나아가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례-참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1절).”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니 그들은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였습니다. 3000 명이나 순종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천국 가는 구원뿐만 아니라, 현재적 구원을 말합니다. 주기도문도 예수님께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일 매일 당하는 시험, 매일 매일 당하는 유혹, 매일 매일 당하는 사건에서 구원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바로 현재적 구원입니다. 여러분,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모든 시험을 이기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12 제자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예수 믿는 사람 전부를 가리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제자를, 사도행전에서는“사도”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일반 교인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별칭 합니다. 제자,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도요, 그리스도인일뿐더러, 여기에 하나의 이름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로, 따르고,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제자입니다. 예봄 교회 성도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