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8ㅣ김남수 목사]
앞으로 사도행전 강해를 하겠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많이 읽으시고 묵상하므로 주일날 설교를 들으시고 적용하면, 여러분 신앙생활에 활력이 얻고, 교회가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의심치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연대는 성경학자들이 주후 59년에서 64년으로 추정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의 두 번째 책으로,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의 후편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즉 복음서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행1:1-3절은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 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수신자는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는“데오스”라는 말과“필로”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전자는“하나님”을 후자는“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오빌로”는“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데오빌로”는 정치적으로 각하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에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사료행전의 저작 목적은 데오빌로를 상대로 기독교의 교리를 변증하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라고 변증하기 위하여 데오빌로에게 헌정한 글입니다.
그리고 데오빌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 편지는 데오빌로를 대상으로 삼아 썼을 뿐, 사실은 모든 교회가 모든 교인이 읽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성격을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목적이 바로 복음의 성격을 설명해 주는데 있는 까닭입니다. 사도행전은 전반에 걸쳐서 복음의 연결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편인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나누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 여기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나고 승천에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활기 넘치는 복음의 후편이 사도행전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지던 사건이, 이제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 이제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영적인 능력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성령과 말씀에 의해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수수께끼 하나가 있습니다. 정작 유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를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이렇듯 핍박한 데에는 하나님의 보다 높으신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기독교가 고스란히 수용되고 말았다면, 아마도 기독교는 땅 끝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핍박과 환난이라는 것이 기독교를 멀리 흩어지게 했고, 온 세계로 전해지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세계화를 일깨워 줍니다.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만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사동행전이 말씀하고 있는 메시지의 요점이 무엇인가? 메시지 첫 번째 요점은 “교회의 의미”입니다. 행전은 초대교회가 비롯된 그 무렵에 기록된 것이니까요. “초대교회”- 교회의 오리지널(original)입니다. 아주 근원적인 맨 처음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교회의 생생한 모습이 있고 본질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신은 히브리 사람들의 회당입니다. 그리고 회당의 뿌리는 선민사상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역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민사상을 모아 놓은 공동체가 바로 그들이 말하는 회당입니다. 회당이 그들의 공동체요 교회의 전신입니다. 이제 기독교로 오면서 교회가 생겨나는데, 그 의미를 선민사상에서 찾습니다. 거기에 뿌리를 둡니다. “교회”가 진짜 선민이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그림자요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메시지의 두 번째 요점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고, 성령을 어떻게 받았느냐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사건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데서부터 성령은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스스로가 고용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고용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설명하는 것도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사람을 고용하십니다. 사람을 붙드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께 이끌려가고, 이끌리어 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십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여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여시므로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딱 한마디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도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섭니다.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람, 인간의 언어, 인간의 문화까지도 다 고용하십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간혹 내가 성령을 받아서 내 마음대로 역사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고용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대단히 깊고 큰 진리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는 성령께 이끌리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은사적인 것입니다. 은사적인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도행전이 말씀하는 메시지의 주제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명령을 보십시오. 4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을 기다리라”- 이 두 가지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왜 입니까? 사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고향이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머물고 살겠습니까? 하루도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다시 옛집 고향 갈릴리로 가버렸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가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안 계신 예루살렘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한번 고향을 떠났으면 이제는 다른 길로 가라. 이제는 널리 세계로 나갈 것이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그동안은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았지마는, 이제부터는 영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안 계시다고 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망스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여기서 우리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할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눅24:49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문맥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나 똑같이 누가의 기록이니까요. 누가복음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같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 성에 유하라 말씀하신 뒤에 이어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까지는 떠나지 말라. 성령의 지시를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머물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결정하지 말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를 놓고 당장에 결정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돌아가서 단 며칠이라도 기도하면서 정보도 수집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성령께 여유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판단하고, 좋다고 싶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결정해 버리려고 하는데 그것은 실수가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테면 장래의 계획을 세우는 문제나 결혼 같은 문제입니다. 장래의 계획 목표를 세우는데 늦은 감이 있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후에 시간관리, 좋은 목표 설정 법에 관한 세미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든지 당장에는 결정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성령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위로부터 입히울 때까지는 이 성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는 절대로 요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마가의 다락방,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식을 치르셨던 그 다락방에 예수님의 체취가 배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얼굴에 비쳤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 당신이 영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고, 증인이 되고,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약속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져 저들이 성령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역하여 교회를 세웁니다. 사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는 제자들이 세워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뿌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저들을 고용하시어 이 같은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5절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다리역할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도래함을 알림으로 주님의 날을 평탄하게 했습니다(눅 3:4).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했으며, 사람들의 죄를 지적한 선지자로서 회개를 촉구하고 물세례를 베풀다가 끝내 순교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성령세례는 자신이 온전히 비워짐으로 성령께서 임하시어 영과 몸과 마음 전인을 온전히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붙들 임을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우리를 붙드실 때까지, 이 엄청난 복음의 사역 안에서 우리들을 이끌고 나가실 때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분부이십니다. 오늘도 이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기 있고, 교회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6절에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그때 이스라엘 백성의 최대의 소망은 로마정부에서 해방되어 다윗왕국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나라 잃은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꿈에도 바라는 것이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에서 다윗 왕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나라를 잃고, 수백 년 동안 이 지상에 화려하고 찬란한 왕국을 다시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보고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당연히 회복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 시기를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왕국건설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제자들은 이 순간이 바로 그 때인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7절에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너희가 알바 아니요”하셨으니 “알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습니다.”하고 믿어둘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하면 그리고 가보고, 이 사람이 이 소리 저 사람이 저 소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알바 아니요”그러니 그런 줄 아십시다. 하나님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위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면 알려 주십니다. 몰라야 할 것이니까, 모르는 것이 좋으니까, 숨겨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인내로 소화할 것입니다. 모르는 게 좋으니까 모르게 하시는 가부다 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 따위에 호기심조차 가지지 말 입니다. 언제 오실까하는 문제는 관심을 둘 것이 아니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지상명령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가장 핵심이 되는 요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식상으로 볼 때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계실 때에 주신 말씀으로는 마지막 당부 말씀입니다. 곧 유언의 말씀,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이라고 하면 숨 거두기 직전에 하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이 유언은 어느 사람의 어느 유언과는 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숨 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형식상으로 구분해 본다면,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감람원에서 남긴 바 본문 8절의 말씀이 진짜 유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비록 모든 말씀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만은 반드시 기억하고 명심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부모의 유언을 망각하는 자는 그 부모의 자녀라 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유언을 명심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원수를 때려 부수는 권능이 아닙니다. 세상을 눌러 엎는 변화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권능은 자기를 이기는 권능입니다. 비겁한 사람들이 변해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핍박도 죽음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참 증인이 되는 권능인 것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 자신을 이기는 문제인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이 권능은 자기를 이길뿐더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게 합니다. 이 권능은 핍박이 있는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할뿐더러 원수도 용서하게 합니다. 악한 세대에도 절망하지 않고 저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해야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닙니까? 미워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세대이지만 그래도 여기에 소망을 걸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저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뜨거운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마음속에서 끓어 오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권능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문제는 성령입니다.
여러분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인격적인 권능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그렇습니다. 헬라어‘두나미스’는 능력이요, 영어로는 power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을 좀 배우고 깨닫고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감격하고 할렐루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받았으면 당장 문간에 나가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더는 원수가 없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질투도 없고, 실망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고, 원망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권능이 아닙니다. 권능 가까이조차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권능을 받습니다. 성령은 곧 권능이요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권능으로써의 성령 - 자신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귀신이 떠나가고, 불치의 병이 치유되는 능력, 이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못 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권능을 못 받으면 증인될 수 없습니다. 증인이 되란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못 받는 사람이 무슨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성령을 받아야만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만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증인이 헬라어로 “말투리아”라고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말투리아”를 영어로 옮겨 놓으면 “마터(martyr)”가 됩니다. “마터”는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클레멘트 교부는 순교자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증거하는 사람이 순교자다. 순교자만이 증인이다.”
여기서 증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재판정에서 증인을 세우고 재판할 때 한번 보십시오.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내 생각에는 요, 내가 느끼기에는 요 …”라고 말하다가는 대번에 판사가 저리가라 합니다. 증인은 간단합니다.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경험한 바, 그대로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인이란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사실성을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경험했느냐 안했느냐. - 그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증인입니다. 때문에 증인은 반드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 없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경험적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생동안 책을 읽었다고 해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있어야만 됩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증인에게는 내가 위하여 증거하는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보았다고는 하지만, 끌려가서 증인이 되는 것은 사실 귀찮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저 분이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귀찮지만, 그것을 떨치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사실이라고 말하므로 오는 불이익을, 손해를, 핍박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굳건한 결단이 있을 때에야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증거하는 방법을 알아봅시다.
첫째는 말로 증거합니다.
이것이 이렇고 저것이 저렇다하고 말로 증거합니다.
둘째는 몸으로 증거합니다.
행동으로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몸으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죽음으로 증거합니다.
여러분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큰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므로 오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가 순교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저들은 서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증인은 순교로 연결됩니다. 순교가 아니고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스데반도, 칼로 목 베임을 당했던 야고보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베드로도, 도끼로 목 베임을 당한 바울도 …, 그 죽음이 순교였기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커다란 절구통같이 생긴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 목을 걸치게 해서 도끼로 목을 내리쳤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죽음이었으나 바울은 이것조차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가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늘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거듭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경험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입버릇처럼 말씀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다 경험한 것이요. 유리가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성령은 곧 증거의 영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공간적으로는 온 세계에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요, 시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우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므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이요, 마지막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