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8~14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은 어두움과 빛이라는 상징적 용어를 넓게 다루고 있는데, “어두움”은 무지와 잘못과 죄 악함을 상징하고 있고, “빛”은 진실함과 의로움과 착함과 사랑 생명을 상징합니다. 엡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이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 이제는 “빛”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바뀐 것은 “그들의 단순한 환경이 아닌 그들 삶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변화는 세상의 빛 되신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됨으로써 주 안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는 말은, 그들의 이제 행위는 그들의 새로운 신분에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빛의 자녀같이 행하라”하는 말은 빛의 자녀 비슷하게 살라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 같이”라는 말씀은 빛의 자녀로써, 빛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가라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두움 가운데 거하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 그 자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와 사망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죄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그대로 어두운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즉, “빛 자체”가 된 것입니다. 빛은 생명, 사랑, 진실, 착함, 의로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므로(요 8:12),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빛 자체가 되며, 또한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가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속에는 이미 “빛의 생명”이 들어와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는 “어두움의 세력”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에는 강한 빛과 약한 빛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밝은 빛을 내기도하고 약한 빛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더 밝은 빛을 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빛은 밝고 환하며, 모든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빛 자체가 어두움과 만날 때 어두움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제가 간증을 했었는데, 대학교 때 기독학생회서 농촌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그 교회 바로 밑에 소위 영하다고 하는 무당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점하러 무당에게만 가고 교회에는 안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한테 제가 가자고 하니까 한 학생이 같이 따라갔는데, 가보니 무당이 그 집 마당에서 멍석을 깔고 무엇을 다듬고 있다가, 무당이 우리를 보고 부엌으로 재빨리 들어갔습니다. 그래 제가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그리스도인이 무당을 꼭 붙들면 점이 잘 안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부엌에서 무당을 꽉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무당이 힘이 쫙 빠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이후 들려온 소식은 무당의 점이 잘 안 맞아 사람들이 무당한테 많이 가지 않고, 교회가 전도가 되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빛이라”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십니다. 빛의 자녀가 어두움과 만날 때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내가 빛이요, 너희가 빛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빛을 받아서, 또 빛을 발사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추면서 주변을 밝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몇 가지 빛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엡5: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첫째는 : 빛의 열매, 빛의 효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면, 거기가 밝아집니다. 밝아짐과 동시에 어떤 영향을 주고 효과를 냅니다. 효과, 이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빛이 주는 효과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밝아집니다. -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어두운 것과는 전혀 틀리지요. 마음도 밝고, 생활도 밝고, 그래집니다. 그러나 댄스홀이라는 데는 어때요? 어두워요. 도박장도 어두워요. 그런 깜깜한 짓 하는 데는 하나같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밝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밝지요, 빛이 주는 효과가 있거든요. 빛이 주는 효과, 열매를 오늘 성경에 몇 가지 말씀합니다.
먼저는 착함이라 했습니다. 착함은 선을 말하는데, 내면적 선입니다. 빛이 우리 가운데 올 때, 내 마음이 밝아지고 내 생각이 달라져서 착한 마음이 됩니다. 밝아져서 욕심, 어두움이 물러가면서 착한 마음이 됩니다. 아직도 착한 마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면적인 선, 착한 마음이 빛의 열매로 이루어지고,
그 다음은 의로움이란, 사람 앞이나 하나님 앞에서 나타난 행동을 말합니다. 빛이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고 바른 길을 일러줍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또 하나, 진실입니다.
착함, 의로움, 진실은 빛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빛의 열매를 어떻게 하면 맺을 수 있는가?
내 의지로, 내 결심으로, 선해보려고 하고, 진실하게 해보려고 하고, 의롭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그것은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저 빛으로 향하면 되는 것입니다. 빛을 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빛의 생명이 없으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환한 빛을 받아들이면, 저절로 착해지고, 저절로 의로워지고, 저절로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기독교인의 윤리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인, 진리, 의, 생명, 사랑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오직 빛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빛을 받아들여 순종하여 살면 됩니다. 빛의 자녀로 행하면 자연히 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진실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사랑하는 마음이 됩니다. 빛이 주는 효과가 난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격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면, 수용하면, 빛으로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같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 5장에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성령만 내 마음속에 오시면, 저절로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빛이 주는 효과로 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빛이 나로 하여금 착하게 살도록 만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는 빛이 분별(구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게 됩니다. 엡5:10절에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내 정욕에 사로잡혀서, 내 욕심에 매여가지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이 이것을 분별하게 합니다. 빛이 정욕도 몰아냅니다. 빛이 자기의 지나친 욕심,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다 몰아냅니다. 그런 것이 이대로 있는 동안에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빛을 환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어두움이 다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빛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약속이 무엇인지, 그 기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 지향적 인간이 됩니다. 영원 지향적 용기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멀어지는 세상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가까워지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기쁘게 삽니다. 미래를 환영하고 삽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입니다.
세 번째로 보니 빛이 어떠냐하면, 빛에는 책망하고 드러내며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엡5: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어두움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방인들은 육의 열매를 도모하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 또는 희롱의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일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로써 악한 일입니다. 빛의 자녀는 이러한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러한 일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쫓거나,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단호히 책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깨닫고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5:12에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로 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듯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이라면 그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엡5:13절에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내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을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종류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한 종류는 책망을 받을 때,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일에 대해 자신을 타당 화하는 사람입니다. 한 종류는 책망을 받을 때,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과 다윗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잘못을 타당 화하며 자기의 처지를 변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든 다윗이지만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의 죄를 책망받자,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동행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오늘날도 충고를 할 때, 그것을 금방 받아들이는 사람은 발전하고 향상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변명하며 계속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큰 매를 맞고 버림을 당합니다. 매여 있는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책망을 받아 회개하면, 어두움에 있던 것이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책망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추어 놓을 때는 어두움이지만, 회개하고 드러내놓으면 빛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 받거나 죄가 드러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망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들여, 빛의 자녀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생각해봅시다. 분집에 대한 말씀인대, 잘 들으십시오. 중요한 말씀입니다. 전인치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됩니다.
직장이나 회사에서 의로운 사람 때문에 그 빛 앞에 자기의 불의함이 노출될 때, 불의한 사람들은 이것을 참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미워하고 모함합니다. 빛 앞에 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살면서 세상을 심판하는 까닭에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고,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고,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회사에서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분을 품지 마십시오. 빛은 생명인 동시에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매듭이 지면, 죄 집이 되어, 하나님께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자녀사랑 부부사랑 형제사랑 시부모사랑, 직장에서 직장동료를 사랑하지 못하고, 매듭을 짓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와 성도 간에 서로 매듭짓지 마십시오. 세상 불의가 들어오면, 의로운 사람을 미워하고 모함합니다. 악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비난 받고, 핍박 받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때, 분을 품지 마십시오. 가정에서 자녀 키우면서, 부부간이나, 시부모와 며느리 간에, 분을 품지 마십시오. 분이 하루 넘으면 사흘이가고, 사흘이 가면 3개월이 가고, 3개월이 가면 18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릅니다. 분집이 오래가면-자녀들에게 대대로 내려가며 열매를 맺습니다.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분집에서 나오는 열매는 옹크라지고 옹크라지고, 그 나무에 그 열매, 그 밭에 그 곡식 나다보면 이상한 열매가 맺힙니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헐벗었으면 입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먼저 풀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풀지 않고 참지만 죄 집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죄악이 담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들어와서 춤을 추고, 마귀가 병을 가지고 옵니다. 굳어지고 풀리지 않고 꼬부라지고 ? 가슴에 쌓이게 되어, 심경 심장 바람이 됩니다. 입도 돌아가고 손이 뒤틀리고, 심장 속에서 피가 심장으로부터 치고 올라옵니다. 뻣뻣이 굳고, 나둥그러져 죽 느러지고, 침을 질질 흘리고,··· 위병, 관절염, 각종 암 병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바람 병은, 40여 가지나 됩니다.
분집에서 오는 것은, 매듭을 풀지 못한 마음의 자세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람 병은 의술이나, 약물로도 못 고칩니다. 세상 인술로는 못 고칩니다. 성령의 불, 성령의 바람만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이 병이 오기 전에 매듭진 것을 풀어야 합니다. 내가 떨리는가? 안 떨리는가? 미운 마음이 없어져야 합니다. 용서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분집을 가리고 죽으면 자손에게 씨를 심어, 자식이 또 거두게 됩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 그 밭에 그 곡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은 매듭을 푸는 것입니다. 용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 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 들이 하는 죄을 몰라서 그러니,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은혜 받은 것 다른 것 아니라, 매듭 푸는 것입니다. 관계의 병, 마음의 병, 육체의 병, 영의 병이 이렇게 서로 연관 되어-마음의 자세에서 오는 것입니다. 매듭진 사람 보면 떨리는가? 안 떨리는가? 사과하고, 서로 먼저 용서 하십시오. 이 길만이 서로 사는 길입니다. 먼저 용서 하고, 먼저 사랑 하십시오. 조건이나, 경우, 이유, 따지지 말고 용서 하십시오. 가정, 교회, 직장, 사회에서 빛이 되십시오.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느니라.” 하였습니다.
본 절은 바울이 이사야서60:1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란 믿지 않아 영이 완전히 죽은 사람을 말하고, “잠자는 자”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타협하여 그 영이 잠들어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영의 잠이 너무 깊이 들어 있으면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영이 완전히 죽기 전에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기 전에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제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빛을 비춰주시게 됩니다.
신앙이 “일어나는 것”은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항상 세수하고 목욕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속사람도 회개로써 보혈과 말씀으로 매일매일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죄에 대해 회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고 그 빛을 다시 발하는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또 하나는 빛은 생명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엡5:14절 말씀은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은 “생명”으로 말씀합니다. 죽은 자까지도 이 빛이 비췰 때 살아난다.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어두움이요, 죄도 어두움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비췰 때, 이 모든 어두움으로부터 빛이 나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물러나게 되어서, 생명을 얻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빛으로 세상에 다니실 때, 그때마다 되어지는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곳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 나와서 소리 지르고, 결국은 그 귀신이 도망가게 되고, 또 모든 환자들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병자들을 다 고쳐주시며, 심지어 예수님 앞에는 죽은 자가 누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상여도 붙들어 놓고, “일어나라.”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앞에는 사망이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요?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예수님의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빛을 받아들이고 항상 빛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더 중요하고 신비로운 말씀은 내가 빛으로 향하여 빛을 받아들일 때, 빛이 나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나를 다스리게 됩니다. 내 마음, 내 인격, 내 성품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리해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결정이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거룩함으로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 길, 빛으로 향하면 됩니다. 빛을 수용하여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 밝은 빛을 항상 환영하고 가슴 가득히 채우면 됩니다. 빛을 따라 살면, 저절로 선과 의와 진실과 사랑과 모든 아름다운 열매가 여기서 맺히게 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이니,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탐스럽게 주렁주렁 맺으며 건강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