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22-23ㅣ김남수 목사]
오늘은 추수감사절인데 우리가 모여 추수감사예배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9월에 포도와 올리브 추수 때에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는데, 출23:16에 보면 이를 초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그 유래가 영국의 청교도에서 온 것입니다. 서기 1607년 영국 제임스 1세는 왕위에 오르자 개신교인 청교도들을 무섭게 핍박했습니다. 박해를 견디다 못한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80톤짜리 작은 범선 매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거센 파도를 헤치고 63일간의 고난 끝에 1620년 12월 21일 북아메리카 대륙에 착륙했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나무를 베어 먼저 교회당과 집을 짓고, 약 20에이커 즉 25,000평의 땅을 개간,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일기와 풍토병, 인디언의 기습으로 1년 동안에 거의 절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슬픔 가운데서도 그들은 가을에 풍성하게 수확했습니다. 그들은 수확한 후 기쁨에 넘친 큰 잔치를 베풀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친절했던 인디언을 초청, 거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전미국은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풍습을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할 때, 이 땅에 전래되어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는 추수감사주일로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건국 4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나라,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강국이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이 건국이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 왜 감사해야 하나?
그러면 이런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삶의 현장에서 왜 감사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도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예비하셨고,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저 많은 새들의 종류, 짐승들, 풀과 꽃들, 아름다운 대지, 바다의 풍족한 어족….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것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가치한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돌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한 손길로 우리를 돌봐주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므로 죄를 짓고 반역의 삶을 시작한 이후, 모든 인간은 죄 중에 잉태하고 죄 중에 태어나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를 얻고,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인이 된다는 것, 이것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은 의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깨닫게 하시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몸과 영이 거룩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날 저녁때 천집사님 아버님께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원래 불교를 믿고 계셨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아니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도 되었지만, 먼저 복음을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들으시겠냐고 여쭈어 더니 마음을 열고, 끄덕끄덕 하시면서 들으시겠다고 의사 표시를 하셨습니다. 복음을 거의 다 전해 가는데 같은 병실에 있는 뇌 질환 환자가 소리를 지르고 벽을 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또 환자는 목을 수술한 환자인데 옆에 서서 복음을 열심히 끝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소동이 있었지만 복음을 간단히 다 전한 후, 영접기도를 하시고, 예수님이 마음속에 오셨다 것을 말씀 드리자, 천집사님 아버지께서 부드러운 소리로 “고맙습니다.”하고 감사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집사님 아버지는 고 김대중 대통령도 고침 못하고 별세하셨는데, 내장부전인 병을 치료 받고, 이번에 영혼도 구원 받았습니다. 참으로 기쁜 시간 순간이었습니다. 전에도 한번 복음을 전했지만, 그때는 말씀도 할 수 없고 의식이 불분명 할 때였는데, 이번에는 한 영혼이 복음을 듣고 감사를 표시하는 천국 백성이 되는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후 병실에서 문을 열고 복도를 나오는데, 복음을 열심히 듣고 있던 환자가 기도 받기 위해 복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해 드렸더니 아주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자 구원받고 병이 치료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을 사모하고 기도받기 위해 기다리는 분도 있고, 복음이 전해지자 어두움의 세력이 드러나 발작하는 소동도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도할 때, 저 뒤에서 귀신들린 자가 거꾸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이, 뒤에서 밤에 모여서, 교회 예배 시에, 또는 몇 분들이 혹은 목장에서 중보기도를 하셨는데, 영적전투에서 주님께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신 여러 성도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을 통해 이런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우리 곁에 와 계신 분이란 의미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스승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가 능력 있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며, 살게 해주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속에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강물처럼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평안을 얻으면, 세상의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강건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섭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은 감사할 조건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할까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진정한 감사를 드린 여인의 기사가 나옵니다. 그녀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는 죽은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녀는 생각한 끝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갈 향유를 담은 옥합이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처녀가 시집을 갈 때 옥합에 나드 향유를 담아갑니다. 나드 향유는 신부의 지참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빈민들이 사는 베다니에서 살았습니다. 나드 한 근이라면 노동자가 먹지 않고 쓰지 않고, 1년 내내 모아야 할 액수입니다. 처녀가 향유를 이만큼 모으려면 여간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생명과도 같은 나드 향유를 드리기로 하고, 예수님 앞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인간적인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께 헌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린 후, 거기에서 흐르는 기름을 머리카락에 묻혀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메시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믿음을 실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온 방안에 나드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가롯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말을 한 가롯 유다의 마음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다.”(요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한 것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 사용한 것은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한 것은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예배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가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고 말씀하시고, 또 “네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이러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마리아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26:1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렸을 때 진동했던 나드 향기는 오늘날까지 복음과 함께 전 세계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감사는 희생과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 “감사합니다.”하고 하는 것도 좋지만,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감사를 드리기 원한다면, 자기희생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감사 제사를 살펴보십시오. 그녀는 인생을 바쳐 헌신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감사, 헌신이 없는 감사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되, 입술로만 드릴 것이 아니라. 전 인생을 바쳐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 감사의 결과
그러면 우리가 이떻게 감사드릴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1 먼저, 진정한 감사를 드리면 행복과 기쁨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감사를 표시하면 마음이 기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면 영화로움을 느끼시고,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십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아내의 감사를 받은 남편은, 기쁨과 용기를 얻어 어찌하든지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자녀의 감사를 받은 부모도 기쁨을 갖고, 자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은혜를 베풀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늘 감사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감사 생활에 관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은혜를 입고도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은혜는 물에 적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하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 받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원한은 두고두고 마음에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부부간의 은혜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은혜도 잊어버리는 것이 오늘날 풍조입니다. 더더구나, 오늘날 이웃 간의 은혜는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합니다.
그런가하면, 더 나아가 은혜를 입고도 원수로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대표적인 인물이 가롯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가롯 유다는 전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인간은 비열한 인간입니다. 비열한 인간은 그 심리상태가 간악하고 비열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악마가 떠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결국 패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 때문에 사회가 살기 어려워지고, 우리의 인생이 사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복받을 사람은 은혜를 감사로 갚는 사람입니다.
큰 은혜이건, 작은 은혜이건,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로 갚는 사람은 위대하고, 그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요, 영혼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삶 자체가 풍요롭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며,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있는 자는 더해주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주시지만, 없다고 불평하면 그 있는 것까지 빼앗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없는 것만을 생각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사과 반쪽을 놓고도 긍정적인 사람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고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은 반쪽 밖에 없다고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주의 은혜로 변화를 받으면 인생과 사물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푼 은혜에 감사를 느끼고, 고마움을 참되게 표시하는 사람을 보면 더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베푼 은덕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에게 참되게 감사를 표시하면 “아, 자식 낳는 보람이 있구나. 내가 뼈가 으스러지더라도 더 일해 자식에게 무엇인가 주어야 하겠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정은 행복과 기쁨으로 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읊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가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궁한 영화로움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감사를 드리면 큰 영화로움을 느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양하고 감사드리자, 지진이 일어나는 기적을 주시고 감옥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행복을 원한다면 끊임없이 감사하십시오. 가족이 서로 감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해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감사의 신앙이 우리 인생을 가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성도를 구원해 주시고,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늘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