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7-24ㅣ김남수 목사님]
엡4:1-16절까지는 교회의 공동체생활, 교회의 일치에 관해 권면했으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에 관해 권면합니다. 17~19절까지는 불신앙인 이었을 때의 옛사람을, 20-24절까지는 새사람의 모습을 대조함으로써, 박력 있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새사람을 입으라.”하는 바울 사도의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냐? 그 속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옛사람과 오늘의 그리스도인과를 대비하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비교할 때, 그 정체성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 믿기 전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만일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옛사람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을 열고 들으면 우리는 오늘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Ⅰ. 벗어버려야 할 옛사람을 생각해봅시다.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 같이 하지 말라”
옛사람의 모습을 본문에서 말하는데, 이방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할 때 이방인이 아니고, 예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19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7가지로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 즉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옛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기 전에는 내가 이랬다, 그리고 또 다시 생각하여 내가 믿지 않았다면, 이랬을 것이다 하는 생각,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크게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오늘 내가 부족하지마는 이만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이 모습 이대로도 충분히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고, 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17절에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대한 주제가 바로 허무입니다. 허망하다 -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다 이것입니다. 현대인의 결정적 결함이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말할 때”, “아이고, 내가 무엇인데 감히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나?” 이렇게 감히 겸손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아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우리 생의 목적입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고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을 잃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엌에서 일하고, 시장에서 장사하고, 하는 주제에 내가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무슨… ,아니 그렇습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입니다. 가나오나, 무엇을 하든지,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목적과 목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목표는 구체적인 것이고, 목적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항상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 모두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내가 10억을 벌어야겠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야겠다.”,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해야겠다.”할 때 그것은 목표입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일은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예를 들면, 지게를 지는 사람이 연말에 은행으로부터 저축 상을 받았습니다. 그 은행에 저금을 했는데 5,000만원을 모았어요.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 지는 사람이 먹고 살면서 5,000만원을 저금했다고 하여 대단하다고, 은행에서 상을 주더라고요. TV 인터뷰에서 아나운서가 그에게 묻습니다. “그 돈 어디다 쓸 겁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아, 쓰다니요.”, “그럼 무얼 할 겁니까?”, “오천만원 또 모아야지요.” “그럼 1억 벌면 무얼 할 겁니까?”, “2억 벌어야지요.” 아나운서가 유도를 하면서 계속 묻습니다. “그래, 그 돈 가지고 무얼 합니까?” 끝내 기대하던 대답이 없습니다. “10억 벌어야지요.”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미구에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허망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목적이 없고, 의미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습니다. 신앙이 없이는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으로부터 오는 목적이 아니고는 목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있도다.”
두 번째로, 불신앙의 사람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총명이란 판단력을 말합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내가 마땅히 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총명입니다. 그런데 그 총명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만나지 않아야 될 사람을 만나고,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많이 했다가, 참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총명이 흐려졌습니다. 시행착오가 왜 생기느냐?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총명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잘 믿는 사람들은 다 똑똑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은 사실상 멍청합니다. 왜요?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무지하다”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무지와 죄를 동일시합니다. 왜 그런 고 하니, 모르면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종종 “몰랐으니 그만이다”하려고 들지만, 아닙니다. 알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는 바로 죄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의 기초는 신앙이다”라고.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고서야 비로소 바른 지식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 아무 지식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지식이나,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 자체가 죄입니다.
불신앙의 결과로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진다.”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죄인도 일시적으로 죄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난데없이 죄인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기까지는 적어도 수십 번, 수백 번의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변을 당할 때면, 으레 천재냐 인재냐 그렇지 않습니까? 세월호 사건도 그렇습니다. 미리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강퍅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강퍅케 됨을 면하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히 3:13). “강퍅케 됨을 면하라” - 마음이 굳어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시간에 회개하지 않고, 순종해야 될 시간에 순종하지 않으면, 마침내 굳어지고 맙니다. 굳어지다 - 헬라말로 “포로시스”(pwvrwsi")라고 하는 말의 뜻이 재미있습니다. 이것은 석회석, 곧 화석화하였다는 뜻입니다. 본디는 돌이 아닌데, 마음이 굳어져서 돌이 되었습니다. 돌처럼 심정이 완고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이지요. 반복되는 충고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리면, 강퍅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강퍅케 된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애굽의 바로 왕 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만났지요. 아니 그 재앙이 내리기 시작했으면, 한두 번 얻어맞고 회개했으면 될 것을 10가지 재앙을 다 맞다니요. 상식적으로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닙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주어지는 말씀이 무어냐 하면 “바로 왕이 강퍅하여”입니다. 사실은 10가지 재앙이 아니라 11가지 재앙이지요. 11가지 재앙을 맞고, 마지막에 장자 죽는 재앙까지 맞은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내지요. 보냈으면 됐지, 따라가기는 왜 또 따라갑니까? 따라가니 결국은 홍해에 수장되는 변을 당하지 않습니까? 강퍅케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굳어져서 화석화되고 보면, 이제는 구제불능 끝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강퍅케 됩니다. 마음이 굳어집니다.
19절에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황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또 하나는 다섯 번째로 “무감각해진다”하였습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헬라 원문에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굳어지고 보니, 이제는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불신앙이면 이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무감각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또 여섯 번째는 “방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방황에 방임하여” 방탕은 성적 방종을 가리키며, 방임은 벌써 다 내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 말하자면 막 가는 것이지요. “막가파” 그것입니다. 방임입니다. 방임이라는 것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저 되는대로 입니다. 가책도 없고, 아무 제재도 없고, 누구 말 들을 것도 없고…. 이제 인간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죽어도 좋다. 그런 마음으로 사니 누가 말립니까? 방임 하여는 술이 많이 취해 무감각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였습니다.
“더러운 것”은 음란의 추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타락은 성적추행을 낳습니다. 동물적인 욕심, 때로는 악마가 주는 욕심, 그 욕심에 끌려 행동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이요, 신앙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요. 신앙 없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불신앙으로 인한 7가지를 이야기하고 나서, 성경은 그것을 “옛사람이요” 이제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새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줍니다. 자, 봅시다.
Ⅱ. 입어야 할 새사람을 봅시다.
20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방인의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과는 정반대로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신자들은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덕과 윤리, 그리스도의 가치관, 그리스도의 자유 등, 그리스도의 생활을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그리스도를 배운 성도들 마음속에는 성령님이 계시므로 그리스도를 목표와 방향을 바로 잡아갈 수 있는 나침반을 소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21절에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 -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배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듣고, 배우면서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복음을 듣고 꼭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역사,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거기서 새사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수용할 때,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직도 내가 판단을 합니다. 내가 선하고 악하고, 옳고 그르고, … 그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도 다 그에게 맡기세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내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내 속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룩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새사람인 것입니다.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합니다. 새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았다하는 말씀은 헬라어 “크티스쎈타”(ktisqevnta) 곧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졌는데, 이상하게도 구습을 못 벗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입버릇이나 행동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습관이 아직도 옛사람의 습관입니다.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새 옷을 입기 위하여 낡은 옷을 벗으라.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낡은 옷, 그러니까 목적은 하나님께 두었는데 아직도 방법은 옛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숫제 돈의 노예가 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데, 아직도 맘몬 우상에 대한 끼가 덜 빠졌습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옛사람 옛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새사람 새 옷을 입으라. 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버리라 합니다.
구습, 낡은 습관입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반복되면서 그것이 습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습관이 그 사람의 의식, 가치관입니다. 어느 사이에 내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구습, 옛날 습관입니다. 우리 가운데 잘못된 습관이 많습니다. 옛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습, 썩어져가는 욕심, 이 구습을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마치 옷을 벗어버리듯이, 신분이 달라졌으면 옷도 달라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신분은 달라졌는데, 옷은 여전하거든요. 마땅히 신분에 따라서 옷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이에 따라서도 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믿었으면, 예수님 믿는데 따른 생활풍속이 따로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옛날 것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어느 사이에 우리 신앙마저 옛날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구습, 옛날 습관, 이런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또 새 옷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또 보니 23절에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 합니다. 심령은 인간의 마음의 영을 말합니다. 마음은 인간의 정신이며,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부분으로 인간의 가장 높은 부분이며 마음, 혹은 혼을 지배합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즉 영적으로 내실이 있어야지 그리스도인인 척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만 흉내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변화되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경건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본 절은 “하나님을 따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목적이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영이 달라진 것입니다. 내면이 달라진 것입니다.
모두 잘 아는 「나이팅게일」 그의 나이 30세 되는 생일날,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오늘 나이 30이 되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선교하신 바로 그 나이다. 주님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이나 많은 잘못된 생각 같은 것을 버리고, 주님의 목적과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목적이 하나님께만,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목적을 위하여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 절은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이라고 합니다.
지었다 - 창조입니다. “거룩함으로 창조된” 이 말씀입니다. 바로 중생한 것, 새 피조물 된 바로 그것으로 옷을 입으라. 합니다. 본래 사람은 흙덩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사람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우리는 재창조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새사람을 - 내용이 그리스도요,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그의 의식도 그의 생활양식도, 가치도, 생활풍속도 새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따라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새것을 입으라고.
탕자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십시오. 탕자는 그야말로 거지요, 탕자였습니다. 그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순간 아버지는 그에게서 옷을 벗기고 “너는 내 아들이라”하고 “새 옷”을 입힙니다. 이제 이아들은 새 옷을 입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속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