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4-6ㅣ김남수 목사님]
지난주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가 되라는 말씀과는 다릅니다. 이미 하나가 된 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고보 사도는 약3:14-16에 “이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 위의 것이요 정욕 적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 되지 못하고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셨으니,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한 후,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하나가 이루어졌는지 그 이유를 7가지로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단어들이지만, 하나 됨에 주의를 집중하여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 하나 됨을 깊이 이해하고 확인한 다음, 하나 됨을 힘써 지켜나가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본문에 “하나”라는 말이 7번 나오는데, 하나 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7번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3번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절에 성령도 한분이시니, 5절에 주 예수그리스도도 한분이시오, 6절에 하나님도 한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4번은 삼위일체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라. 왜냐하면 주도 한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생활에 있어서 가정생활이든, 교회생활이든, 한 나라든, 하나가 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7가지로 하나가 이루어진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므로 우리가 하나된 것을 알고하나가 되기를 굳게 결심을 다짐하면서, 하나 되기를 더욱 힘쓰는 복된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먼저, 4절에 “몸이 하나이요”라고 간단히 말씀합니다.
이 몸이라고 하는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혜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요, 우리는 그 머리에 붙어있는 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몸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고, 눈도 있고, …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 몸 하나인 것입니다. 이쪽이 아프면 저쪽도 아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몸입니다.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유기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형아가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둘인데 서로 등이 붙어있습니다. 머리가 둘, 손이 넷, 발도 넷입니다. 그러면 이 기형아는 두 사람이냐 한 사람이냐 이렇게 묻게 됩니다. 랍비는 이런 대답을 합니다. “이쪽을 때리면서 울게 한다. 이쪽 아이가 울 때 다른 쪽 아이도 울면 하나다. 이 쪽 아이가 아파할 때 다른 쪽 아이는 아파하지 않으면 둘이다.” 아시겠습니까? 하나 한 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쪽이 아프면 내가 아픕니다. 저쪽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합니다. 이것이 한 몸입니다. 내 손가락 하나가 아파도 등까지 저립니다. 지끈지끈하고 온 몸이 쑤십니다. 그래서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다. 온전히 유기적 관계, 생명적 관계에 있다. -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로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나에게 교만할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이니까. 한 몸의 지혜이니까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4절에 “성령도 한분이시니” 하였습니다.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가 중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해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중생이 일어납니다. Be born again. 새롭게 신기원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태어나는 새 사람인 것입니다.
성령의 두 번째 역사는 성화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집니다.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달라집니다. 이것이 내 의지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착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깨끗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성화입니다. 점점 거룩해집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화입니다.
Glorification, 영화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디서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 건강할 때도 사랑, 병들 때도 사랑,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계속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같이 중생하고, 같이 거룩해지고,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므로 여러분도 다 같이 이 시간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을 했습니다. 같은 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같이 찬송을 하고, 같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는 성령이 하나인데,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달리 생각하고 서로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도 한 분이시오, 그런고로 너희는 하나다 합니다.
그리고 셋째, 4절에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서적인 소망은 언제나 영원한 것이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입니다. 소망이 하나입니다.
가나안 땅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길, 모두가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소망, 그들은 40년 동안 고생하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마지막 가야할 땅,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 거기를 바라보고 오늘 다 같이 격려하고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천막. 왜요? 가나안에 가야 하니까. 우리가 지금 하늘나라를 지향하고 삽니다. 정말로 이 부르심의 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잘 입고 못 입고가 대단한 것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큰집, 작은집이 문제입니까? 거할 곳이 있으면 됐습니다. 하늘나라를 생각할 때 별거 아닌 것입니다. 한 소망 안에서 볼 때, 우리는 전부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뉴욕 주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헬렌 워스」라고 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교회 봉사도 잘하고, 여전도회 회장도 지냈습니다. 정말 교회 봉사에 열심히 일하는 모범적인 감리교인입니다. 대학 교수이기도 한 이 독실한 부인이 언젠가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수혈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피가 불순한 것이어서 그만 에이즈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몸이 점점 썩어들어 옵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럴 때 그녀가 쓴 시 한편이 「인터 프러터」라고 하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그 시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대목이 있는데 소개해드립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절망했고 화가 납니다. 내 가슴은 찢어지고 극도로 우울합니다. 대학일, 교회일, 동네일, 귀여운 손자들까지 주시고, 그렇게 내 앞에 문을 열어주시더니, 왜 갑자기 모든 문을 단번에 닫아버리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지금 회개합니다. 내가 구원의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인 것을 잠시 잊었던 죄를 회개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영광을 약속하셨는데, 주님은 나에게 영광의 새 몸을 약속하셨는데, 낡고 썩어질 이 몸을 가지고 내가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오, 주여! 지금부터 얼마를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게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 같은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먼저 가고, 뒤에 가고 그것뿐입니다. 한 소망,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그 소망을 놓고,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야말로 우리는 다 같이 형제요, 자매요, 친구요, 함께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한 소망,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 됨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5절에 “주도 한분이시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 주님을 섬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주님을 섬기고, 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목적도 하나요, 생의 의미도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같이 주님만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다 주인이 아닙니다. 누구나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우리는 다 같이 그의 백성일 뿐입니다. 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점을 항상 우리 마음에 두어야합니다.
다섯째, 5절에 “믿음도 하나요.”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자기 의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선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흔히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아시지요. 무슨 의미의 말인지 다 압니다. 피차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대동소이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내 의나 자기 정결함에 대한 자기집착에 빠져있는 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잊어버립니다. 애시 당초 우리는 시작도 끝도 오직 믿음으로, 우리 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똑같지 않습니까? 당신이 좀 낫소, 못하오, 당신이 왜 그리 부족합니까?, 당신은…. 이것이 오십보백보의 놀음인 것입니다. 오직 한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입니다.
여섯째, 5절에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란, 신앙적으로 정리해보면 나로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세상으로 죽고 하나님 나라로 사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모든 교우 앞에서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공포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우리가 똑같은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다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른 이름으로 세례 받는 사람은 여기에 없을 것입니다. 세례는 내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았다는 의미도 있지마는, 동시에 우리가 똑같은 이름으로 세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하나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하나입니다. 다 한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니 하나입니다. 누구에게 받았는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여기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 6절에 “하나님도 한분이시니”라고 합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고, 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분에게만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유의 아버지시라”합니다. 만유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의미가 있고, 생명의 근원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특별히 신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 위에 계시다는 것은, - 곧 초월적인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유 안에 계시다는 말은, - 또한 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초월하시고, 내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아버지 같은 부성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진노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진노 속에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의도 따로 없고, 남녀도 따로 없고, 특별히 높은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 됨을 꼭 알고 강조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고루고루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되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두에게 똑같이 복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전설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려고 두 제자에게 십자가를 만들어 메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십자가를 메고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나는 빈 몸으로 가고 너희들은 십자가를 메었으니까 너희는 올 수 있는 데까지 오너라. 나는 좀 먼저 이 길 끝에 가서 너희를 기다리마.“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하루가 지난 이튿날 저녁에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보시고, “오 수고들 했다. 그래 십자가를 지고 오면서 무엇을 생각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점점 가벼워집디다. 그래서 아주 쉽게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감사하면서 왔습니다.”하고 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가 점점 무거워지더라고 대답합니다. 불평·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루를 지나서 이튿날 저녁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하도 무거워서 이걸 지고 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하고는 내동댕이치듯 십자가를 내려놓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네가 원망하고 불평해서다. 이 십자가는 원망하고 불평하면, 점점 커지는 십자가다. 감사하고 기뻐하면 점점 작아지고, 그런 십자가인데 네가 원망하고 불평했으니까 무거울 수밖에, 몹시도 무거웠겠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십자가가 무겁고, 가볍고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내 탓입니다. 주님께서는 똑같은 것을 주셨습니다. 애당초 똑같은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무겁게 메고 가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메고 가는 것입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모두 같습니다. 남들과 똑같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한 성령, 한 분 예수그리스도,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한 소망, 한 믿음으로, 한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한 세례를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하나가 되었으니,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며 하나 되는 생활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같이 많은 여러 가지로 하나가 되었는데도,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한 것 - 곧 마음의 하나 됨, 영혼의 하나 됨이 없다면 얼마나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아무리 여러 가지로 하나 되게 해 놓았을지라도, 서로가 한마음 한 영혼으로 하나 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하나 됨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는 서로 한마음 한 영혼으로, 서로의 편에 먼저 서서 서로를 위해 줄 때, 우리는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평안할 것입니다. 한마음 한 영혼으로 평안 가운데 하나된 것을 지켜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예봄교회 성도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마음, 한 뜻, 한 영혼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신선한 기름부음을 넘치도록 받아 ?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굳게 지키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복된 승리의 삶을 사시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