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3:8-13 ㅣ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 가운데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영광, 또 그를 통하여 복음을 받는 성도의 영광됨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귀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는지 모르는 감옥살이 현실 속에서도 감사와 송에 충실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종래는 로마 감옥 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 고난을 치르면 하늘나라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한 그러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위대한 점입니다.
이제 바울을 봅시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7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 군이 되었노라” 곧 하나님의 일군이라 하였고, 그러한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상 반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말합니다. 참 굉장한 말입니다.여러분, 누구를 만날 때, 만날 때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해 보았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정규교육이란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1년을 다녔다가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상원위원이 되었고,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통해 세계적으로 높이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기본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이러했다고 합니다.누구를 만나든지 모든 경우에서 “저 사람은 나의 선생이다, 나는 저 사람으로부터 배운다.”하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항상 배우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 사람은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망조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대하든지 저 사람은 나보다 크다고 생각합시다.
가장 잘 알고 가까운 부부생활도 그렇다고 생각합시다.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아내가 나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흑자이니까요.
그런데 “내가 어쩌다 저 사람한테 왔나 저 형편없는 사람한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손해 보았잖습니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굉장히 유명한 분인데,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면 꼭 이렇게 대답합니다. “처 덕분에 잘 있네.”인사를 하면 꼭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어떤 분이 왜 그렇게 대답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 대답이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두고 훌륭하다고 말하지, 그러나 내 성질을 내가 잘 알아. 내 못된 걸 내가 알고 있어. 하나님이 나를 보고는 복을 안 주실 거야. 집에 있는 저 사람 때문에 내게 복을 주셔서 나와 내 자손들이 다 이렇게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처 덕분에 잘 사는 게 분명하지.”
자, 오늘부터 이 말을 외워둡시다.
“처 덕분에 잘 있네.”, “남편 덕분에 잘 지내지요.”결국 무엇입니까?
나보다 저 분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작은 사람입니다.
저는 큰 사람이고, 나는 사람들 중에 더 작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곧 바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키나 바울 이름을 보아도 작다는 뜻이며, 도덕적으로 영적으로도 모든 기독교인들 중에 가장 작은 자들보다 더 작다‘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고, 모욕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무가치하다는 것과 자기를 향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자비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겸손이 그가 사도로서 책임을 수행하는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울은 그의 인격적 겸손을 사도적인 권위와 결합시켰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을 극소화하면서 자신의 직분은 극대화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를 가장 작은 위치, 가장 겸손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명의 중요성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엄청난 일이요, 막중한 일이다.
이렇게 아는 것, 또한 중요한 점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부엌에서 시장으로 왔다 갔다 할 뿐입니까?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던지 내가 하고 있는 일, 그 의미가 중요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절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시시한 일이고, 형편없는 일이고, 정말 의미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모두 엎질러져 쏟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소중한 것이다.
특별히 총체적 의미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명의 중요성을 압니다.
맡은 일의 중차 대성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에게 의탁한 복음을 전파하는 특권적 사역을 세 단계로 진술합니다.
1. 특권적 사역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8절 하 반절에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풍성, 부요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과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요함입니다.
그 부요함은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얻으며, 치유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승리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는 것, 하나님이 화목 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하나로 통합되며 적대감이 사라지고 평화가 시작됨,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교제하고,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됨, 이 모든 것은 장차 오게 될 더욱 부요한 것들. 바울이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광대하고 심원하여 도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궁핍에 내버려두시지 않고, 언제나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신다고 확신했으며,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담대히 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 전도의 열성을 회복하는 데에는 사도바울과 같이 복음의 부요에 관해 확신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요, 인류를 위한 모든 부요함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가만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2. 두 번째 바울의 특권적 사역은 신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9절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신 두 번째 특권적 사역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밀의 경륜” 즉 “하나님의 계획”을 영원 전에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이 계획을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계획이란, 그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구원받은 인류들을 신앙으로 자라게 해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제하여 함께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비밀을 사도바울을 통해 드러나게 하신 은혜를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대상을 이방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새로운 재창조를 시작하셨고, 언젠가는 재창조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비밀”은 결국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조와 구원을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일에 만물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극히 큰 능력과 권세로 감추어두었던 비밀을, 비밀이므로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비밀을 사도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직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권세를 주셨는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그에게 위임된 임무 중요성에 대해 잘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 바울의 특권적 사역은 하나님의 지혜를 우주적 세력들에게 알리게 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바울의 관점은 더욱 넓어집니다.
비록 복음의 대상이 직접적으로는 인간들을 향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천사들,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 자들에게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이는”이라는 말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사와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이나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비밀이었고,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절은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 즉 교회, 특히 바울을 통하여 성령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는 이 진리는 천사들에게 계시하지 않았고,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통하여 이 비밀이 선포될 때, 천사들도 들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통하여 영적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세력들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우리를 보고 우리말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생성되는 것을 황홀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실제로 영적 세력들은 교회의 생성과정에서 각종 지혜뿐만 아니라(10절)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11절) 보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한 특권적 임무를 볼 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계시에 의하여 바울에게 하나님의 계획의 비밀을 알리셨고,
둘째는 바울에게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와 영원한 목적이 정사와 권세들이 교회의 성장을 지켜볼 때, 교회의 실상을 통하여 그들에게 알려지도록 하였습니다.
11절, 12절은 3장의 결론 부분으로 주된 교훈은 성경적인 교회중심성입니다.
11절에 “곧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나 무작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⑴ 세상 역사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적인 예정도 이미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 예언되어져 있으며, 그 예언이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세계역사를 움직이십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 즉 목적이 영원부터 구상되었고,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선은 그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구원의 행위를 온 세상에 선포함으로써 실현시킨 것입니다.
현재 역사 속에서 수행되고 있는 영원한 목적,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 즉 예수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새롭게 된 인류와 재창조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세대동안 감추어져 왔으나, 이제 드러내어진 비밀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관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였고, 따분한 연대들, 우리들 나라를 다스린 왕들 명단을 외우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모체는 무엇입니까?
역사란, 무계획적인 사건의 연속들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그 분의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임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구상하신 계획을 역사선 상으로 드러내는 일과 숨겨진 일들을 통하여 역사내의 절정을 이룬 다음, 미래의 영원으로 진행시키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역사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⑵이제 또한 예정을 개인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해봅시다.
예정 이라함은 우선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뜻이, 인간의 의지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는 가운데 사건을 수습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만,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문제를 수습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나 행동에 의해서 흔들리는 그런 구원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먼저 있었고,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이라는 말을 합니다.특별히 에베소서에서 놀랍게 강조되는 것은 “I'm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구원이 오늘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정이 먼저 있었고, 은혜도 먼저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오늘입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믿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셨고, 10년 전, 20년 전, 오래 전부터 계획적으로 나를 이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요, 신비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래서 오늘 구원론 적을 설명을 하는데, 12절을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적인 교리를 보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놓으시고, 성령님이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예정이라 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역사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어놓으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함을 얻은 심령의 정체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입니다.
참 하나님의 자녀, 자녀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가만히 보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 하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내가 좀 실수해도 사랑한다 생각합니다.
그 사랑의 확신이 서면 용기가 생깁니다.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끝으로 말합니다.
13절에 “그러므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내가 감옥 에 있다고 그러다가 죽을지 모른다고 걱정하지 말라.
왜요?“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오늘 당한 현실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 영광만이 아니라, 너희의 영광이라 하였습니다.
왜요?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신 분이 바로 위대한 바울 사도 순교자니까요.
그리고 그 분이 감옥 에서 베풀어 준 은혜에 따라 내가 높은 수준에서 예수님을 믿으니까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 에서 죽는 것 같은 엄청난 고난을 당해서 값비싼 복음, 그것을 받아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당연히 바울의 고난은 우리의 영광이지요.
산정현 교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산정현 교회에 백인숙 이라고 하는 34살 처녀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요코하마 여자 신학교를 졸업한 뒤,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산정현 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 에 있을 때, 전도사님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마는 순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배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여자라고 무시해서 그랬는지 안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살아난 셈이지요.
그래서 늘 순교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공산당원들이 들어와서 또 문제가 생겨 김철훈 목사, 장일선 목사 두 분이 순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님은 목사님 세 분이 순교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종내 자기도 끝에 가서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녀가 순교하기 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여 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 은혜가 시련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고, 또 시련은 없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은혜만이 축복이 아니라, 시련도 축복이라는 것을. 은혜와 시련, 이 둘은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고 주님이 축복하고 교육할 때 찾아옵니다. 당신은 감당하지 못할 은혜도 감당하지 못할 시련도 주지 않습니다. 바라 옵기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주님만 찬송하게 하소서. 주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죽여도 예수님을 믿겠느냐?”하는 공산당원의 시퍼런 질문에 대하여, 그녀는 미소 짓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입니다.”
그녀를 흙더미 속에 산채로 쳐 박아서 죽였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살고 죽는 문제보다 훨씬 높은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대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