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35-38, 롬10:13-17 ㅣ 김남수 목사]
「볼티모어 선」잡지에서 한 설문을 내고 설문의 응답을 모아 콘테스트를 벌린 일이 있었는데, 이 설문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당신에게 생명이 1년 더 주어진다면 그 1년을 당신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이 답하기를
“도우면서 살겠다.”
“주면서 살겠다.”
“전적으로 사랑하면서 살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겠다.”
“모든 사람을 축복하며 살겠다.”
“범사에 찬송하며 살겠다.”
응답한 것들이 높이 평가받아, 후한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남은 생(生)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이겠습니까?
만일에 주어진 생애가 1년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그 1년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생을 보내고 싶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선하고, 가장 가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을 하셨는데, 오늘 본문 35절에 잘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복음을 전파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먼저, 복음을 전파하시어 아담이 범죄 한 이후, 인간에게 마귀의 본성이 들어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라고 했습니다(요8:42-44).
그러나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면,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참으로 놀라고 복된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여 예수님을 닮아 성장하도록 가르쳐, 그대로 지켜 행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12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훈련하는데 생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었으며, 삶과 성품과 가치가 예수님을 닮아 변화되어 성장하여 갔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영과 마음과 몸이 연약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하여 주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치유할 수 있는 권세와 권능을 주시고 자신이 하신 일을 제자들(교회)에게 위임해 주시며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38절에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꾼이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에 우리 주님의 명령을 따라 따르는 표적 즉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치유를 통해 살아 역사하는 복음을 전하여 추수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훈련받은 이 복음전파는 예수님이 전파하셨던 원초적인 복음전파 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치유하시고 치유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이 사역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전파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치유는 못하는 절름발이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는 사도시대로 끝났고,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특별한 은사 받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훈련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며, 인간의 이성에 의한 울타리를 쌓아 벽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에 치유하지 못하고, 더더구나 훈련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탄이 영의 눈을 어둡게 해놓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복음을 영광스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벽을 넘어 훈련받았고, 치유 받으며, 남들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 가보면 환자들로 꽉꽉 차있으며, 50세가 넘으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이상씩 질병을 가지고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영 마음 몸 전인이 하나님 은혜로 치유 받아 건강들 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합시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역사관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임금인 이 세상, 혼란과 고통 가운데 있는 현실을 보시면서 역사를 농사로 이해하셨습니다.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유리방황하는 군중을 보시며 추수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러한 인간을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사 지옥까지 내려가시고 부활하시므로 인간을 속량해 놓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간이 반역한 죄를 깨끗이 씻어놓으시고, 자신의 의인 하나님의 의로 믿는 자는 의롭다함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길을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몸은 채찍에 맞으시고, 마음은 멸시와 조롱 비난을 받으시며, 영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므로,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 전인의 상처와 질고를 치유해놓으시므로 인간이 치유 받아 건강하게 살도록 치유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라“(갈3:13-14).
예수님께서 저주에서 속량해 놓으시므로 가난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아 풍성한 삶과 성령의 약속을 받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올 미래 내세문제까지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어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신령한 몸으로(고전15:42-49) 변화되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복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죽으면 망(亡)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이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인간을 속량해 놓으시고, 또한 지상 생애동안 이 속량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영광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세세토록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추수하기 위해 각 성과 마을에 다니시며 피와 땀을 흘리며 애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니 추수할 곡식이 많으나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추수할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7 38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역사관은 농사짓는 일로 보셨는데, 여러분 농사하는 이치를 한번 봅시다.농사할 때는 먼저 종자가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종자의 생명력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우선 좋은 종자가 없으면 농사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종자 그 종자를 뿌리는 일에 심는 일에 농부가 수고하고 있습니다. 봄에 나가서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작업이란 굉장히 힘듭니다.
이것은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또 가꾸는 것입니다.
씨를 뿌렸다고 내어 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김도 매주어야 됩니다.햇볕이 뜨거우면 덮어 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듯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소망 중에 가을이 올 것을 생각하며 이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또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합니다.
사실 추수하는 것도 아주 힘듭니다.힘든 일이지마는 이상하게도 추수하는 일은 기쁩니다.
추수는 힘든 줄 모르고 합니다.
씨 뿌리는 수고 가꾸는 수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축제의 계절입니다. 추수는 축제입니다.
추수할 때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모두가 내 곡식이든 남의 곡식이든, 내 밭이든 남의 이든, 다 같이 기쁜 마음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에 말씀하신 대로 복음은 아름답고 좋은 소식입니다(17절).
곡식을 거두는 추수 때는 축제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승리인 것입니다.
장차 죽으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가는 복된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된 기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은 온 세상에 전해야합니다.
문제는 이 복음을 복음으로 이해하고 복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이 복음의 진실성 복음의 확실성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복음은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인정을 하든 아니하든 우리 앞에 있는 이 복음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치 옥토와 같이 아주 좋은 마음 밭이 되어 잘 받아, 복음을 복음으로 순응하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고, 질고에서 치유 받고, 축복받아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의 것입니다.
오직 겸손하고 온유한 자는 이 복음으로 인하여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 복음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해석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전부 원한과 적으로만 바라봅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새소리를 듣고도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새가 노래한다.”고 합니다. 새가 우는지 웃는지 누가 알아요?
자기 마음이지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유명한 말씀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분이 하물며 무엇을 못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받은 것 아닙니까?
이렇게 복음 안에서 해석하는 해석능력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모든 것을 복음으로, 모든 것을 은혜로 해석하는 그러한 사람이 될 때, 은혜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스터키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게 되면 내가 사랑하는 자의 기쁜 일 좋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내 사랑하는 자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가 저렇게 공부를 안 하는데 장차 어떻게 될까?저렇게 빈둥거리다가 장차 어떻게 될까? 그래서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까? 내 사랑하는 자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결혼을 하고 10여 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데 이 남편이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아무리 권해도 안 믿습니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하루도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날이 없습니다.
그저 한밤중이 되어서야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래도 이 집사님은 남편을 한결같이 잘 대접했습니다.
취하여 집에 돌아와서 또 술상을 차리라 해도 차렸습니다.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2차 3차 술판을 벌여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같이 따라온 친구가 이 부인이 끝까지 웃으면서 잘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어째서 우리 같은 술주정꾼들을 이렇게 잘 대접합니까?”내가 예수님을 믿거든요.“
“우리 집사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내가 집에만 들어가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왜 다릅니까?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 남편도 “당신 어서 말해봐. 무슨 이유가 있는지….”하고 재촉을 합니다.
이 여 집사님이 차분히 대답을 합니다.
“사실은 내가 이 사람을 놓고 기도를 하는데요. 이 사람은 아직도 안 믿어요. 이사람 이렇게 술 먹고 돌아다니다가 한번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는다면 바로 지옥으로 가겠지요? 그게 너무도 뻔 하니까 세상사는 날 동안이라도 잘 먹으라고 대접해주는 거예요.나야 천당 가니까 지금은 고생을 해도 괜찮아요.“
여러분 !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 ― 아내, 남편, 자녀들, 친인척들, 친구들, 이웃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을 모르면 안 됩니다.
책임을 져야지요.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 지식이 있든 없든, 지위가 높든 낮든, 마찬가지입니다.
운명은 다 한길로 가고 있습니다. 한 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장례식 같은데 가보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아주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안 믿는 사람을 보니까 통곡하고 절규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쁨과 소망을 주는 것이 예요.
최고의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긴박합니다.
내일 안 믿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죽는다면 예외 없이 지옥에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17절)”
복음을 전하는 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굴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전도해보면 압니다.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고 있다는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목적이 그 가치를 인정한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헛되지만, 복음 전하는 이 거룩한 역사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장차 마지막 날 칭찬과 영광의 면류관을 뭇 성도들과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천국에서 별처럼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내가 몇 사람에게나 전도했나? 나로 인해 구원받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이 질문에 대답하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심성의를 다해 전도하여야 합니다.
“Super sta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음에, 가롯 유다는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작가의 상상입니다마는 그 후에 가롯 유다의 혼령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울부짖습니다.
그 대사는 이렇습니다.
“왜 당신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내 영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이 만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그 다음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진작 나에게 말했더라면 내가 미쳤다고 당신을 팔았겠습니까?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라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받아들여 믿지 않았습니다. 이 아침에도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유다)이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안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해야 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바로 이 부르짖음, 이 원한의 소리를 주님께서 듣고 피 값을 전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찾으십니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얼굴,
영혼을 추수하는 자의 기쁨,
이 축제의 기쁨 가운데 사십시다.
이 길로 우리 모두 나아갑시다.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길을 위하여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복음을 전하는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승리와 축복, 가장 높고 영원한 충만한 기쁨의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