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22-33ㅣ김남수 목사]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교인들의 삶과, 오늘날 현대교회와 교인들의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시대는 현대에 비해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이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큰 예배당과 음향기기 컴퓨터 교육 수준 등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탁월하게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과 오늘날의 교인들의 삶을 비교해 볼 때,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헌신적인 뜨거운 사람과 권능 생명력이 미미하고, 인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똑같은 예수님을 믿고,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고, 동일한 성령을 모시고 있지만, 초대교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 충만한 신자들이였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초대교인들에 비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을 신약성경을 상고해 볼 때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차이는 성령 충만 인데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 충만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 성경을 중심으로 성령세례의 결과에 관해 오늘 아침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아침 설교말씀을 듣고 자신의 부족이 느껴진다면,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또는 교만하여 거역하지 말고, 겸손히 마음을 열고 들음으로 성령세례의 은혜를 사모하여 성령강림 기념주일 특강 때 간구하여 모두가 다 성령세례를 받으시기 부탁드립니다.
Ⅰ.첫째: 성령세례의 결과는 능력있는 증인이 되도록 구비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행1:8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담대히 나를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이라고도 하는데, 초대교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하는 성령행전인 것입니다. 권능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dunamis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발전기-dynamo, 역동적인 ? dynamic, 폭파시키는 폭약-dynamite가 유래 되었습니다. 이 단어들이 주는 인상은 강력하고 폭발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령세례를 받자, 큰 권능이 나타나 예루살렘성은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자 3000명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이 떠나며,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행8:7~8). 성령의 권능이란? 성령의 은사 ? 즉 치유, 믿음, 기적, 지혜, 지식, 예언, 방언, 등,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의 복음증거가 퍼져나가는 곳마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어 사회 전체를 뒤 흔들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부흥이 또 어떤 지역에서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무지와 무관심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와 경험은 초대 교인들과 너무나 멀고 다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품위가 있고, 점잖은 삶을 영위하지만,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저항도 받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영향력이 너무나 미미합니다. 사회는 부조리와 무관심, 신천지나 구원 파 같은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웃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왜 교회에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그 답은 권능입니다. 폭발적인 영향력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에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으로도 성령의 권능을 대신 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전4:20에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단지 우리말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말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 하십니까? 여러분들의 말에 능력이 나타납니까? 이 영적인 권능을 여는 문의 열쇠는 성령세례이며, 성령세례를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신약성경에 의하면, 성령세례의 중요한 결과는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증거 할 수 있도록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덧입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능이 충만하시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둘째: 성령세례의 결과는 초자연적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히6:4~5에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는 이 땅에서부터 내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맛보게 합니다. 계시록은 내세, 천국에서 성도들과 천군천사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형식과 의식에 매이지 않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찬양을 예로 들면, 대학시절 수련회 때 미국 오순절 신학대학 총장 버터필드 박사님이 강사로 오셨는데, 셋째날 학생들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았고, 마지막 날 밤에 설교를 마치고 가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찬양을 인도한 경험이 없었지만, 모두 일어서서 같이 손을 들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고 하고, 찬양을 드리는데 찬양이 하모니를 이루어 향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찬양하자, 성령님이 감동하시므로 눈물을 흘리며 회개들을 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새벽 한시까지 찬양을 올려 드렸습니다. 불빛마저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들이 부드러워지고, 기쁨이 충만하며, 얼굴이 평화롭고 환해지며, 해방과 자유가 넘치는 밤 이였습니다.
또한, 초대 교인들은 기적의 풍토 속에서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기적이 매일 매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교회는 매주 하나님의 치유기적이 일어나 간증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신약교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희귀한 질병으로 죽기 직전의 질병을 조 광희 장로님의 형님이 치유 받고 살아나셔서 지금 건강하게 생활하시고 계시며, 암 환자가 낫고, 아이를 못 낳는 가정이 여섯 가정이나 아이를 낳고, 간의 GOP GDP 수치가 600 700이었는데 깨끗이 치유 받고 건강하게들 살고들 있습니다. 그 외에 많은 치료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다면 건강한 신약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론 말만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 역사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며, 그 능력 안에서 삽니다.
나아가서 초자연적인 능력의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기도의 능력을 부으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초대 교인들은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 하다 잡혀 심문과 위협을 당한 후, 이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자, 초대 교인들이 일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자 옥 터가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났고, 모두가 다 성령 충만을 다시 받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기도와 간구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도를 해도 해도 부족함을 느끼고, 기도에 담력과 힘을 주시며, 간절히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게 하시며, 성령 안에서 드린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도 응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영육 간에 임합니다. 성령세례 받을 때,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므로 귀신이 떠나가기도 하고, 질병이 치료되기도 하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성령세례를 사모하고 구하여 다 받으십시오.
사탄은 성령과 성령치유를 싫어합니다. 분별하십시오. 자신 안에 이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이 거짓으로 속여 반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므로 담대하게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Ⅲ.셋째: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능력 있게 잘 전하며 가르치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신데, 성경을 깨닫게 하는 인도자요, 교사이십니다.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심으로 가르치신 말씀을 이해하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날 설교는, 구약성경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설교 시 이해하게 하셔서 성령강림에 관한 영감 있는 설교를 하게 하였고, 3000명이나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당대 가장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성경을 배웠지만,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성령 충만을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9:20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즉시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느리고 점진적인 노력 끝에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는 순간, 성령의 역사로 즉시 깨달았습니다. 성령님은 베드로와 바울 초대 교인들에게 역사하셨듯이,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그리스도인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인도자요, 교사요, 해석자이신, 성령님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Ⅳ.넷째: 성령세례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매일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도함을 받는다고”고 할 때, 현재 진행형을 쓰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한번만이 아니라, 매일 지속적으로 인도하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진실한 신자들도 바울의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이나 요한 웨슬레는 이 말씀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웨슬레의 표준 설교 중의 한 편이 성령의 인도하시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다음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영적인 성숙과 성공에 도달하는 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임을 바울은 갈라디아서5:16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2:10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서 재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선한 삶을 살려면 롬12:1,2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라 먼저 길과 행동을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그 뜻과 길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구하지 않는 계획이나 행동에 도장을 찍듯이 승인하고 축복을 내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단체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어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결코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수많은 시간을 들인 수고와 엄청난 액수의 돈이 낭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진정한 영성과 열매 맺는데 가장 큰 적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 기독교란 이름을 붙이고, 행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땀을 흘린 활동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성령님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성도들에는 말씀으로, 내적 직관인 음성으로, 환상으로, 꿈으로, 은사 받은 분들의 예언이나 상담,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제가 전에 성령님의 인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해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당도 적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아 어려움을 이기고 지었습니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경험했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을 했을지 모르지만, 매일의 삶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규칙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나아가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은 전인격을 위한 어치는 생명을 공급해 주는 문을 엽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이 넘치는 생명의 근원을 성령님이라고 밝힙니다. 롬1:4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Holy spirit, 거룩한 영, 성결한 영으로 예수님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이와 똑같은 역사로, 신자의 몸도 예수님의 재림 하실 때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고후4:1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거룩하고 넘쳐흐르는 생명,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요10:10). 인간의 내적본성을 만족시키며, 신체의 필요도 만족시키시고, 영육간의 온갖 자연적인 압박과 마귀적인 압박이 몰려와도 패배시킬 수 있는 힘과 거룩한 치유와 몸의 건강을 주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고후4:8-11).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와 동일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질병 사단 가난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고 생명으로 가는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육체는 여전히 질병에 걸리기 쉽고, 겉 사람은 쇠약해지나 우리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은 성도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질병을 치유하고 쇠약함을 저지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인” 것입니다.
Ⅴ.다섯째: 성령 세례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자신의 사랑을 신자의 마음에 부으십니다. 롬5:5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신자의 마음에 부으시는 이 사랑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어떤 인간 세상의 사랑보다도 높고 숭고한 사랑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성적 욕망에 불타는 사랑, 남편과 아내사이의 사랑,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부으시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근원과 본질이 유래된 사랑이며, 이 사랑은 헬라어로 agape입니다. agape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완벽한 사랑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인간의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속량 받게 해 주신 사랑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절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agape를 썼는데, agape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런 사랑을 알지 못했거나, 어떤 분량만큼도 나타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변화되어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받은 사랑의 첫 경험을 성령세례를 통하여 무한하게 확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사랑(agape)를 “부은바 됨”이라는 동사는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완결과 완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이 한 가지 행위에서 하나님은 그 분의 사랑의 모든 충만함을 신자의 마음에 남김없이 부으심을 뜻합니다. 아무것도 남김없이 모든 것이 다 부어졌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구할 것이 없고, 이미 마음속에 받아들인 것을 누리며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가 사랑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은 한 강가에 사는 사람이 또 물을 달라고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자신이 쓰는데 필요한 물의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 받은 신자는 이미 자기 안에 하나의 강이 아니라 생수의 강들, 거룩한 은혜의 강들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의 삶에 발생하는 어떤 필요도 다 채우실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7:38,39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신 기도에서 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이와 똑같은 사랑이 순교자 스데반이 죽기 직전에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을 위해 올리는 기도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은사를 사랑을 따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데 은사를 사용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agape사랑의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13:1,2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하며, 바울은 특유의 겸손함으로 영적 은사를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신자로 자신을 비유합니다.
이 시점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를 오용한다면, 그 은사를 회수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에 대한 답은, 만일 어떤 선물이 일단 주어진 다음 선물을 준 사람이 임의로 회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선물이 아닙니다. 일단 선물이 주어진다면 준 사람의 관점에서 벗어나, 오직 그것을 받을 사람의 관리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 점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라고 말씀합니다.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는 말의 의미는 “취소할 수 없다” “번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은사를 주시면 그것을 결코 회수하는 일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받을 당시와 같은 내적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지 않고도 외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한다고 하여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항상 보여 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시금석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만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분량 이상으로 성령 충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일4:12,13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고 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모든 활동 중 가장 위대하고 영속적인 것은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각 신자의 삶에 낳기를 원하시는 결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세례의 결과들은 능력 있는 증인이 되도록 구비시키시고, 초자연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며,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매일 인도하시며 치유와 건강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는 결과들을 고찰했습니다.
6월 8일 성령강림 기념주일 오후에 성령세례에 관한 특강이 있는데,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사모하므로 기도를 준비하시고, 전에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성령 충만을 소멸하신 분들은 다시 재 충만 받으시고, 또한, 외부 인사들에게도 성령세례 특강소식을 알려주어 그 분들도 사모하고 준비하여 참석 하므로, 모두가 성령강림 기념 주일에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기념 주일이 되어, 성령님과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시다. 아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이여! 충만히 채우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부으소서! 서로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능력 있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 이 땅에 초대교회와 같은 부흥! 부흥을 주옵소서.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