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35-10:1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하신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는 “이사야 53: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벧전2:24”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짧지만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예수님의 대속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마태, 마가, 누가 세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선 먼저 첫 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일어났으며, 중풍병자도 일어났고, 나병환자도 고치시는 등, 이런 저런 사람이 다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겠습니까? 모인 사람들은 구경꾼들만 모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 몰려 왔습니다. 너도 나도 병 고침 받겠다고 온 것입니다. 많은 병자들이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일단 소문을 낸 사람들에 대해서 그 공로를 치하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은 되도록 많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훈련하고 있는 성령사역과 전인치유사역 훈련이 끝날 때, 치유전도성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훈련 잘 받고, 좋은 소문을 많이 퍼뜨립시다. 좋은 소문은 퍼뜨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소문도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세미나에 대한 김 남영권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참여한 최미선 성도님이 은퇴하신 시아버지 목사님 등 10여분이 참여하도록 소문을 냈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일들이 파급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얻은 간증,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축복,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는 은혜가 있으면, 잠잠하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소문을 내야합니다. 전도라는 것은 어렵거나 별거 아닙니다. 전도란 소문내는 것입니다. “예봄 교회 가 봅시다. 참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이 다 소문입니다. 소문은 자꾸 내야 합니다. 명심 합시다.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저 사람의 병을 고쳤다면 내 병도 고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저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내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복 받았다면, 나도 예수님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복음에 대한 진실한 응답입니다.
세 번째 생각할 점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는데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의사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해결해 줄 수 없을까? 무슨 방법이 없나? 하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 필요 그 간절한 영적욕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소문이 파다해도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한번 구경이나 가봐야지 하고 그만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생의 한 번 뿐인 절호의 기회이다 꼭 가야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환자의 가족 역시 그렇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되겠다고 서두릅니다. 구세주에 대한 이런 갈망이 있고서야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마1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복음에 대한 소문이 넓게 퍼져나갔지만 실제로 복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달려 나온 사람은 환자들 눌린 사람들뿐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다시 말해서 병자로서 치유 받아야겠다는 마음, 간절히 바라는 마음,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집단성과 개인성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치유전도 집회 때 수천, 수만 명이 모였을 때 복음을 전한 다음, 예수님 믿을 사람을 초청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하도록 하여 영접시킵니다. 치유도 마찬가지로 아픈 사람이 일어서도록 하여 아픈데 손을 얹으라하고 대중적으로 명령기도를 하므로 치유합니다. 또는 환자수가 적을 때는 1:1개인적으로 치유 할 수 있습니다. 눅4;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대중적으로 치유성회를 할 때 1;1로 치유할 수 없을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치유사역훈련을 시켜 2~3명이 팀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여 치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임하신 동일한 성령님을 믿는 자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손을 얹으면 성령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눈이 실명되었을 때, 무명의 평신도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치유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십니까? 부활의 권능,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동일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을 얹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너무 환자의 수가 많아 혼자 개별적으로 모든 환자를 다 다룰 수 없을 때, 믿는 자를 치유사역훈련을 시켜 팀 사역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전에 목회자치유 세미나 4,5기에 훈련받은 목사님들 5~600명이 함께 7,8000명을 대상으로 올림픽 잠실체육관에서 팀 치유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2000여명의 중풍 귀머거리 갑상선 등 50여 가지 이상의 병자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이 말은 아주 귀중한 말입니다. 나 하나만이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하나님은 특별히 나만을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큰일 적은일 이런 저런 일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이요 일대일 개인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개별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개별적인 사랑을 계시로써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셨습니다. 환자들의 아픈 부위에 친히 손을 대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며 치유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저물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복음서에 다 나타납니다. 저물 때 해질 때에 -- 이 시간은 안식일 끝나고 다음날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일로 말미암아 시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온 것입니다. 유대인의 시간관념으로는 해가 지면 날이 바뀝니다. 우리는 해가 떠야 새 날이 시작되는 데, 유대인은 토요일 날 해가 지면 곧바로 일요일이 시작됩니다. 유대인은 토요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지기를 기다리다가 해가 떨어지자 우 몰려온 것입니다. 여기에 퍽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병 고침 받는데 왜 그리 시비가 많습니까? 병 고치는데 안식일이 왜 그리 큰 문제가 됩니까?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시비, 율법학자들의 변론이 분분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느라 내내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떨어지자마자 모여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안식일이어서 이들이 안식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시간에 맞춰 예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눅10:21) 선한 사역인 치유를 하는데, 인간적인 규례나 습관적인 타부(금기) 같은 것들이 은혜를 그르치는 예를 저도 실제 경험을 했는데 너무나 많습니다.
다섯 번째는 본문에서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예수님은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귀신 말만해도 이상한 눈으로 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자를 보면 귀신을 ?아내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귀신들린 것도 병이요, 병든 것도 귀신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병이 귀신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 병자가 단순히 육체의 병에만 걸린 것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면서 정신의 병이요, 정신적인 병인 동시에 영적인 병으로 보셨습니다. 한 마디로 병이란 총체적입니다. 우리가 가끔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신경 쓰는 정신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곧 영적인 것입니다. 또한 마음에 무거움 짐이 있으면 그것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병을 보실 때 총체적으로 보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 전인치유를 하셨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병만을 병이라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인 병도 병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귀신들린 자와 병자가 늘 같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마10:1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실 때도 말씀하시기를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함께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귀신에 대한 것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의 짓이거나 영향입니까? 분명합니다. 기독교 치유는 총체적이요 전인치유 입니다. 기독교만이 전인치유를 할 수 있다고, 의학 박사이며 영국 왕립대학 회원인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목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의학 자체가 전인을 다룰 수 있는가?--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가? 진실로 의료행위는 결코 그런 기능을 위해서 의도된 적도 없고 준비된 적도 없습니다. 단호히 나는 오직 기독교만이 전인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의상 기독교만이 이런 임무를 수행 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 육체와 정신을 치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인을 다루는 것은 종교, 곧 기독교의 임무입니다.“ 기독교는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영적인 병, 귀신의 문제, 등 못 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립니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총체적이요, 전인적인 방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41가지 치유 방법을 연구해 보면, 말씀으로 치유한 것이 명령 21,회 설교 6회, 가르침 4회로 도합 31회인데 이는 41회의 75%에 해당되는 치유가 말씀으로 치유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병도 치유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똑바로 받으면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받는 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치유하는 능력과 묶임을 푸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오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꾸준히 말씀을 들을 때, 영 마음 몸의 병이 치유되고 건강케 됩니다. 전에 우리교회 우명숙집사가 지금은 목사가 되었는데, 약단지를 항상 끼고 뚱뚱하게 기력이 없이 살았는데, 우리교회에 나와 쭉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자 체중이 정상으로 빠지고 건강케 되니 너무 감사해서 신학을 하고 지금은 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섯 번째로 오늘 본문은 사53:4절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 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하신 이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병 고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동일하게 우리의 병을 대신 짊어지신 것도 대속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사53:12절의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개혁개정 번역 성경은 ‘지며’가 ‘담당’으로 번역되어 있음)의 “지며”와 사53:4절의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의 “지다”는 둘 다 “짊어지다”는 의미로 히브리어로는 모두 동일한 단어 나사(ac;n:)이며, 헬라어로는 동일한 단어 바스타조(bastavzw)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지며”는 “걸머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대신 병을 짊어진다, 내가 그토록 병든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표현입니다. 무슨 말로나 정신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보는 순간 그 아픔을 느끼시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인용한 사53;4절의 ‘우리의 슬픔(아픔)을 담당하셨거늘’의 “담당”과 사53:11절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담당”은 히브리어로 동일한 단어 사발(lb's;)이며, 헬라어로는 동일한 단어 람바노(lambavnw)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담당”이 영어로는 take인데 단순히 동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즉 내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이 사람의 병든 책임과 그 병이 내 것인 양 예수님께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과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자기의 책임인 것처럼, 자기의 아픔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도 담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잡한 성서학적인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고라도,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죄와 병을 동시에 하나로 보고 대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고, 받아들여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병을 예수님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대신 걸머지셨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 마음 몸으로 전인이 걸머지셨습니다. 그것이 치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바로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걸머지신 결과로서 치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죄를 걸머지신 순간, 이것을 믿음으로 그 죄가 사해지고 병이 낫습니다. 여기에 담긴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참된 의미를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종종 치유기도를 드릴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그의 아픔이 내 몸에 전달됩니다. 그의 아픔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그 병이 낫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몸이 몹시 피곤하고 쓰러질 지경입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하나님!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라고 기도한 것은 낫지 않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고 희생하셨습니다. 죄 사함과 치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은총을 믿으시므로 누리고 자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