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10-17ㅣ김남수 목사]
인형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소녀는 손님 앞에 여러 인형을 꺼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밝은 소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중에서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느냐?” 소녀는 한참 말이 없다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 됩니다. 약속 할 수 있으셔요?” “그럼”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해어진 못난 인형을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나는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적이 놀란 아저씨는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사랑한 인형 이예요. 그리고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수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예요.” 이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키우며 하숙을 치고 아주 어렵게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하숙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네 자녀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그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맏아들 이예요 우리의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사남매중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이 애가 재롱을 부리고 예뻐요. 그래서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저는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애는 유복자로서 제 아버지 얼굴도 못 봤거든요. 그래서 이 애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이 부인은 또 부인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눈물을 머금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이거든요.”
여러분! 이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 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 있는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 하느니 못 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 절대적입니다. 사랑의 이유는 사랑일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장 비참한 인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척추 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가족들도 그를 내 버렸으며, 그에게 소망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두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정신적 장애자요. 의식 부자유자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한 정도입니다. 영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고, 정신도 병들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본때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버려진 완전히 소외된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유명한 가치론 학자의 R. B. 페리(Ralph Barton Perry)의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는 물질적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돈이 많으면 접대 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 받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고 사느냐 이것이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립니다.
둘째,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튼튼하고, 늠름해 보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대로 키가 180cm정도는 되고 ... 그렇지 않습니까? 월드컵 이후 축구 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움을 준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러한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 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느냐,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지향하고 살 때, 그 만큼 인생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자, 이러한 가치론에 준해서 본문의 여자를 생각해 봅니다. 그에게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에 준해서 생각해 보면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 있다고 하는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만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을 ...”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 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소유로 평가하지 않으셨고, 지식으로도 아닙니다. 건강과 젊음으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가기준은 오로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봅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하고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내면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다, 선민의 딸이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내면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에게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십니다. 자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부자유하고 억압된 생명을 보십시오. 현재를 볼 것이 아니라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는 재미있는 책을 썼습니다. “집단의 반란”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집단의 야만주의”라고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지식”이라고 하면 단순한 지식이 있습니다. 무엇 인가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이렇게 둘이 있습니다. 문제는 제 3의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합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이는 아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의학도 이제는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분야의 환자가 와야 알지, 그렇지 않은 환자는 진찰조차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의학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너무 많이 공부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어차피 무식한 사람들끼리 사니까요, 다 무식하니까요. 왜요? 전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연구, 연구 하면서 건강까지 헤칩니다. 그래서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병들어 가면서 돈 벌겠다고 기를 쓰는데, 그렇게 벌어서 뭘 합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재벌들이 재판 받다 병보석으로 침대에 누워서 나오곤 합니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데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졌다고 하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재산이 빚입니다. 부채가 더 많습니다. 있다고 하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내가 뭘 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뭘 압니까? 아는 양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용어 “집단 야만주의”가 나왔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것이 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 우상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아는데 실은 안다고 착각하는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런 주제에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불행한 영혼입니까?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을 볼까요? 북한 사람들입니다. 북한이 이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어떻게 유지하고 나아 갈수 있을까요? 거기는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 할까요?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6.25때 그 무서운 폭격으로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께서 우리를 거두어 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 지금 이렇게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죽으라고 하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그 놈들 내가 복수 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사로잡힌 것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복수할 마음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못 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핵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 거기다 돈과 전력을 다 쏟다 보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도 속 내면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데올로기,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꽉 갇혀 있습니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 못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생명만 유지 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들을 수 있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매여 있습니다. 속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술이나, 마약, 담배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담배를 오랫동안 많이 피우게 되면 폐 꽈리가 니코틴으로 까맣게 되어 결국에는 폐암에 걸립니다. 폐암은 암중에 가장 독한 암이어서 낫지를 못합니다. 저는 폐암으로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죠. 그 뿐 입니까? 명예욕, 금전욕, 쾌락욕, ... 잘못된 습관에 젖은 것, 다 매인 것입니다. 제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십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십니다. 은혜를 부여 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십니다. 이 여자에게 안수 하셨는데, 안수는 사랑과 동정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미래가 보여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문제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보는 것입니다. 이 매여 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시고, 이제 병을 고치시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 평생 주께서 내게 베푼 은혜를 간증하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 아름다운 자유로운 여자를 생각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 환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여 안수하여 고치십니다. 이 여자는 온전케 되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심으로 성령의 부활의 능력을 흘러 보내 치유하신 것입니다. 오후 훈련시간에 치유하는 안수에 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시범을 보이고 실습하겠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 하십니까? 정신적으로 부자유 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 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과 이론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완전한 자유인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 그 불쌍한 것에서 자유롭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