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아 5:1-6ㅣ김남수 목사]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한 사람 살았습니다. 이웃 제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를 품에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붙잡은 채, 이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안고 가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를 놓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이는 내 형님의 아기입니다. 나는 내 아기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 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 갈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않는 법이다“하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잠14:34절은 말씀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때에 망하고, 어느 때에 흥합니까? 경제가 중요한 것 같고, 기술도 중요하고, 자본도 중요하고, 요샛말로 노하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재산상속 문제로 부모를 쳐 죽이는 사회입니다. 이보다 더 잘 살게 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GNP가 올라가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도덕성입니다. 고위 공무원의 “섹스 스캔들”이 들통 나 옷을 벗는 일이 계속 언론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망할 때 보면, 도덕적 타락으로 망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5:1절에 “이 성을 두루 다니면서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그 한사람만 찾으면, 그 한 사람으로 온 성을 용서하리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는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 죄목이 여러 가지 입니다마는 남색, homosex를 했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성적으로 많이 타락했습니다. 특히 sodomite라고 하는 말은 남색 행위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sodomite는 동성연애, 혹은 사람과 동물 간에 갖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처럼 악한 동물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양 사람들은 개 키우기를 무척 좋아 합니다. 개 미장원이 없나... 그 뿐입니까? 개가 죽으면 비석을 세워주고,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주인이 먼저 죽을 때에는 개한테 유산까지 남겨 줍니다. 도대체 개를 개 취급하지 않고, 사람보다 더 높게 대우합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그네들의 생각은 “개는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다”---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공을 들여도 마지막에는 나를 배신하고 후회하게 만들지만, 개한테는 적어도 그런 배은망덕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말 입니까? 사람이 개만도 못하게 된지도 오래됩니다. 물어뜯지 않는다고 장한 일입니까? 말로 물어뜯지요. 그것을 두고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요. 인간의 타락상이란 여러분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배신하고, 속이고, 더럽고, 간사하고, 죽이고, 썩어 문드러진 것이 인간입니다. 동물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타락이 인간세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온갖 더러운 행위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참지 못하시고 이 도성을 진멸하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소돔과 모라는 경제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요, 정치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참으실 수가 없어 유황불을 내려 진멸하셨습니다. 사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사해가 옛날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더라도,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4)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 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회개가 없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끝내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외치는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고 죽이는 교만이, 바로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롯이 사위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창19:14).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심판하신다.“해도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신 합니다. 끝내 믿지 않고 부인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찌할 수 없이 증거를 보여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사악함과 교만함, 허망 됨을 마침내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니느웨성 사람들은 40일 후에 망한다는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뿐입니까?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마음을 다 해 뉘우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어떠한 죄라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심판대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아 망할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성과는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여러분! 남한과 북한은 어떻습니까? 죄로 썩은 악취는 안 납니까?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한 까닭을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죄 때문만도 아니요, 회개가 없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러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의인이 없어서 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성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5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창18:26).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만일 의인 50명이면 어찌하시겠습니까? 45명, 40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이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하고 하소연 합니다(창18:27~32).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을 찾으면, 내가 그 10명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 이 더러운 도성 전체를 용서하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아무리 죄가 커도 의인 10명만 있으면, 그 의인 10명으로 인하여 그 성 전체를 사하시다니요. 그러나 10명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인 10명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기대를 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 의인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양화가 악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 10명이 있다면, 그 10명으로 인하여 그래도 언젠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 영향을 받아서 구원받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는바,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명만 있으면 이 도성 전부를 사하시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애끓는 답답해하시는 말씀입니까? 그 한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고 전체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랍고 그 크신 사랑과 외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허물이 많고 다 부족해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훌륭하고 귀한 것이 그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거기에 마음을 두십니다. 그 나머지 것은 다 덮어 두시고 의롭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과의 관계요,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과 행위가 다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의로운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크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장점만 보시고 나머지는 다 덮어 두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봅시다.
먼저,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내 사라를 자기가 살기위해 누이라 하고... 간사하고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순종하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인으로 여기셨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의 남편을 전쟁에 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는 용서 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모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또 어떻습니까? 그도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온유하고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의 모든 잘못을 덮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완전한 의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완전한 의인이란 있을 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믿음이든, 순종이든, 정직함이든, 겸손이든, 온유든, 충성이든, 이 한 가지 의가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이 여기시고 전체를 의롭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그의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가 87세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는, 하나님 말고는 원하는 것이 없는, 그런 전도자를 내게 100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100명만 있으면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 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의롭다 하심을 얻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도덕적으로 그리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여기시고(롬4;3), 의롭다 하셨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의롭다 하셔서 의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할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처음이요 최후의 마지막 한 가지인 이것, 믿음마저 없다면 끝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경건과 두려움으로 중보기도 하는 아브라함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아브라함처럼 기도할 것 아닙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이 찾는 그 한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처럼 바로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하실 것입니다. 남한의 주도하에 이 민족에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통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 입니다.
애굽의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 집에 있음으로 해서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집에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라반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 야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인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하나가 여기에 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곳에 복을 내리실수 있는 그러한 사람, 나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내리실수 있는 사람, 그런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다. 이북이 어떻다, 일본이 어떻다, 세계 경제가 어떻다, 이 세상을 보고 낙심하거나 비관하지 마십시다.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 하나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 모세와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중보적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더하시며,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통일을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들어 쓰시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