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08:12-20ㅣ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말하는 중요한 결정적 교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중요한 근본 원리입니다.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양자’교리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귀한 진리를 어떻게 이렇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참 위대한 분이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물론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만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양자, 양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양자제도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우리는 자기 핏줄을 연연합니다. 그러나 양자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양자 삼는 것은 서양 사람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Ⅰ. 그럼 양자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서양 사람들의 사회적인 관습을 배경으로 하여 이 진리를 말씀하는데, 당시 서양의 관습은 양자가 되는 순간부터 완전한 아들이요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고아든 거지든 노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양자 삼으면 법적으로 그 순간부터 완전한 그 집의 자녀가 됩니다. 예를 들어 빅토리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셨거나 영화를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거기 보면 코제트라고 하는 고아가 나옵니다. 이 고아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장발장이라고 하는 신분 높은 분이 코제트를 양녀로 삼아서 보호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입니다. 그러나 장발장이라고 하는 높은 신분의 양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귀중한 존재요, 아주 당당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네로’황제,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였습니다. 네로는 본래 노예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노예의 아들이 클라디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서 황제까지 되었습니다. 서양은 왕이 혈연적으로 친 아들이 있어도 그가 시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아들로 만들고, 그 아들이 대를 이어가게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혈연적인 핏줄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분의 문제요, 사회적인 계약의 문제입니다. 양자가 되면 법적으로 자녀의 모든 권세가 양자에게 주어집니다.(요1:12)
Ⅱ. 그러면 양자가 갈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기 전과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세례를 받습니다. 물속에 잠길 때.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것을, 즉 옛 사람에 속한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된 것을 의식을 통해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올 때, 주님 안에서 산 것을 새사람 새 신분에 속한 것을 의식을 통해 고백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양자가 되면 옛날에 나를 낳아준 본래 가정과는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과거를 전적으로 잊어버려야 합니다. 양자가 과거에 매이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람에 속했던 것과의 관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본문 12,13절에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옛 가정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와 양자는 무관합니다. 본문 12절에 ‘빚진 자로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빚졌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많은 빚을 지고 죽으면 아들이 빚을 대신 갚아야 합니다. 아들이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아주 엄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아들 중 하나를 자기 양자로 삼으면 양자로 간 그 아들은 전번 태어난 집의 빚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양자로 되는 순간 법적으로 과거의 모든 책임과 무관해집니다. 그래야 양자로서의 길을 바로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조상이 지은 죄의 빚과 구원받기 전에 지은 죄의 빚이 주님의 십자가로 다 청산이 되었기 때문에 그 죄의 빚과 나와는 전혀 무관하고 자유케 된 것입니다. 해방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세 번째로, 양자는 양자된 그 집의 신분에 속하게 됩니다. 내가 비록 노예나 고아라 하더라도 귀족 집에 양자가 됐으면 당당한 귀족입니다. 상속도 받게 됩니다. 신분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면 우리의 옛 생활과는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옛날에 속했던 옛 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Ⅲ. 그러므로 양자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본문 14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과의 영적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영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하시는가? 쉽게 간단한 예를 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느냐?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자꾸 나쁜 방향으로 기울어지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은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선한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에는 성령님이 내 마음과 뜻을 주장하시고 선한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성령님께 이끌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아바 아버지 불러 보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절에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차영배 교수님이 고등학교 때 기도하시다가 성령을 받고,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계속 ‘아버지’라고 부르짖다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그때부터 목소리가 우렁차게 커졌으며 신학을 하셨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성령님이 부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에 하나님이 무섭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양자의 영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을 받은 사람은 내 죄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런데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하고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을 알게 됩니다.
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 합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 큰 권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이자 특권은 기도입니다. 아무런 절차나 수속을 밟지 않고 하나님 앞에 원하면 언제나 나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품에 안겨 나를 인자하게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다정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사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 입니다. 구약에도 아버지라는 개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희미합니다. 두려워 하나님의 이름도 제대로 못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한마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이 관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주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탕자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을 말씀함입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요, 돌아올 때에 무조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 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Ⅳ. 마지막으로 양자의 특권과 의무에 관해 말씀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특권,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당히 하나님의 가정의 영광과 특권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옛 사람은 죽었고 관계가 끊어졌으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것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가정의 새 사람이 되었으니, 새 가정의 생활양식과 법도를 배우고 익혀 나가야 합니다. 높은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양자된 새 가정의 특권과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자된 새 가정의 신분에 속한 의무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제는 이 집이 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자된 그 집의 의무에 예속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약속한 것 의무를 충성스럽게 잘 감당할 때, 새 가정에서 약속한 특권과 축복도 충만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특권과 축복만 얻고자 하고, 의무를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렸을 때 눅2:4절을 보면 성전을 아버지 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이 성전에 있는 기쁨이 가장 크셨습니다. 요2:17절을 보면 주님께서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열정적이셨던지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한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 다윗 왕을 죽이겠다고 ?아 다닙니다. 그러다가 압살롬이 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죽이겠다고 ?아 다닌 아들이 죽었는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였으면!’(삼하18:33)이라 말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못된 아들이라도 아버지는 이렇듯 아들을 사랑합니다. 하물며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랑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원리적으로 벌써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양자답게 살지 못해도 법적으로 여전히 양자입니다. 양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랑이 충만하시고, 한이 없으시며,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어 항상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예봄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