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16-20ㅣ김남수 목사]
따뜻한 봄날 부모의 손을 잡고 나들이 가는 어린이들은 기쁨과 생기가 넘칩니다. 그러나 부모께서 안 계시는 어린이는 생기가 없고 우울합니다. 부모가 옆에 계시는 것과 안 계시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에 어머니가 따듯하게 맞아주는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므로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나누며 들어주고, 믿고, 칭찬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밝고 활기차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주님과 교제하며 사랑 받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활기차게 복음을 증거하고 능력으로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므로 그들의 곁을 떠나시자 고아처럼 한동안 두려워하고 약해지며 지리멸렬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아침에는 성도들을 도와주시며, 힘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다른 보혜사 성령님에 관해 말씀드림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처음 보혜사이신 예수님
보혜사란 “우리를 돕기 위해 옆에 와 계신 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처음 보혜사 되심을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또한 요한일서 2:1절에서는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의 주를 보면 대언자를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보혜사로써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예수님께서 도주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의기 양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11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가 승천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4,5)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다시 한번 무력감을 느끼고 지리멸렬하며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믿고 전혀 기도에 힘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무력감을 철저히 고백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둘째,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
처음 보혜사인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한복음 14:16)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보혜사란 헬라어로 “알로스 파라클레토스”인데 “알로스”란 종류와 성질이 똑같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100원짜리 동전 두 개는 종류와 질이 똑같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은 똑 같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오, 똑같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처음 보혜사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이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부활 승천하시면, 제자들과 이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성도들을 위해 영원히 보혜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1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 같은 권세와 권능을 가지고 인간과 영원토록 동행하시며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대신 성령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신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영적 고아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과 우리와의 관계
1. 너희는 저를 아나니
본다 안다는데,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요한복은 1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지만, 성도들은 성령님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인 우리가 성령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는 바람같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람을 만지거나 보지 못하듯, 성령님도 만지거나 볼 수 없습니다. 모세나 바울도 하나님과 성령님을 직접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성령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알 수는 없지만, 역사하심을 봄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압니다. 기도할 때 응답을 받음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알 수 있고,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는 은혜를 통해 알 수 있고, 전도할 때 구원받는 일이 일어남을 통해 알 수 있고,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치유된 것을 봄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시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르는 척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문에 인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서로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라고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그 사람이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우리는 모욕감을 느낄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성령님이시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을 때, 저는 “성령님! 제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그럴 때, 저는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역사하심을 체험하곤 합니다. 여러분도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을 인정함으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2.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예수님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요한복음 1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듯이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여러분! 한 지붕 밑에서 함께 거하며 사는 사람들은 서로 서로 인정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 우리와 함께 거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역사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환영합니다.”라고 하면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뜻을 거역하면, 성령님을 소멸시키고, 슬프게 해드리는 것이 되어, 결코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살지 말고, 성령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중심으로 살면, 성령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맙니다. 이 때문에 “성령님! 저를 인도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성령님과 함께 거하려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성령의 뜻을 받들고, 내 중심을 버리고 성령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십니다.
3.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체 속에는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 기관을 이용해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만일 이 기관이 제거되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의 기관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성령님을 소멸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생명의 원동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 나가 의롭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미움과 싸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가지고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기쁨을 가지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전도를 해도, 어려운 일을 해도 피곤을 느끼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계신 성령님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언제나 구하십시오. 내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지쳤을 때, 성령께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평강과 희락을 주십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힘을 얻고, 말씀을 증거하며, 기도해 줄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이 사실을 많이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성령님께서는 아홉까지 은사를 주시고,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지혜와 지식과 영 분별의 은사, 방언과 방언통변과 예언의 은사, 믿음과 병 고침과 능력 행함의 은사를 통해 권능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해주십니다. 또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우리 생활 가운데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우리가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성령님께 구하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는 사람 속에 거하시면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베풀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 (디모데 후서 3:1)고 하셨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실감합니다.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림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성령님께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