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4-35ㅣ 김남수 목사]
미국의 세계적인 권위 있는 유명한 예방의학자 피터헨슨은 건강에 대해 3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적당한 음식, 적절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나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늦잠 자는 것, 술, 담배 피우는 것 등을 버리고 자기를 자제할 수 있어야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터 헨슨이 말하는 요점은 다른데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건강 비결의 5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50%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 문제라기보다는 건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건강의 문제를 넘어서 죽고 사는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불행의 문제가 결코 물질도 명예도 아니고, 문제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주신 교훈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랑입니까?
본문을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오직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에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주님의 인격, 성품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사가 찾아와서 주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옛 계명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랑이라는 단어는 구약 율법이나 새 계명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랑의 정의가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같은데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구약이나 신약이나 문자는 사랑으로 똑같은데, 다른 점은 사랑의 동기와 행할 수 있는 힘, 동력이 새롭게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율법은 사랑의 동기와 행할 수 있는 힘, 동력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좀 더 말씀드립니다. 중요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옛 계명, 율법인 10계명은 7가지가 ‘~하지 말라.’, 3가지는 ‘~하라.’입니다. 즉 옛 계명, 율법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이거 하지마라.’, ‘저거 하지마라.’, ‘싸우지 말라.’, ‘오줌 싸지 말라.’고합니다. 유치한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역시 ‘하지마라.’고 합니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예를 들면 아이들을 보면 잔소리를 많이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소극적인 미약한 인간이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 못했기 때문에 문자에만 얽매여 금기, 즉 금기에 매여 두려워하는 종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율례와 계명을 주신 이유는 계명을 지키면 신6:24절에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과 복을 주는 계명인 율법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인간이 연약하여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저주와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율법대로 살 수 있는 동기와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백성은 문자에 매여 즉 ‘~하지 말라.’는 금기에 매여 두려워하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종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셨습니다. (롬8:3~4) 율법을 행하시고 가르치심으로 올바로 해석해 주셨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동력을 주십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의문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 왔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므로 율법을 다 지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율법을 완성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의 동기를 부여해 주십니다. 새 계명은 ‘하지 말라.’는 금기가 아니라. ‘하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스스로 하는 자발성 선택적인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인간은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과 구약 율법은 동일하게 사랑입니다. 같은 점은 구약과 신약의 두 계명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 똑같은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도 구약이나 신약이나 ‘생명과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차이점은 구약 율법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랑의 동기와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새 계명은 사랑의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목숨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동기요 근원적인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셔서 목숨까지 주셨으니 그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떻게 생길 수 있습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힘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갈급해하고 사모하고 사랑을 하나님께 구할 때 성령으로 사랑을 부으십니다. 우리에게 부으시는 성령님은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고 아는 순간 자신을 희생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3, 14에서 ‘만일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라고 합니다.
사랑에 미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쳐버리고, 죽으면서도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는 것, 이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왔고 지금 받고 있는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셨습니다. 참 사랑은 이것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것이 참 사랑이요, 진정한 사랑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이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떠나면 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 어떠한 사람입니까? 우리 생각해 봅시다.
첫째 주님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즉 이해받기를 기대하지 않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다가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몰라주면 낙심하고 좌절해 버리기가 일 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이러한 유의 사랑이 아닙니다. 요13:1절에 보면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느니라.’
그 당시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내일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리라는 주님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네가 우편에 앉을 것이냐? 내가 좌편에 않을 것이냐?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들이 두려워 다 도망가고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해력이 부족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사랑을 모르는 자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둘째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원수 사랑은 기상천외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받고 있는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는 동일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대에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목숨을 버리셨고, 내가 원수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움을 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또 악한 작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눅 6:35~36)고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의롭다하시는 사랑입니다.
가장 큰 선물이 무엇입니까? 모든 허물과 약점을 다 덮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좀 더 나아가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로 영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인의 누명을 쓰시고, 죄인으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죄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해주시고, 자녀로 영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에게 의를 덮어 씌워주시는 그 사랑을 받고 살아왔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넷째 주님의 사랑은 치료해주시고 승리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채찍에 대신 맞으심으로 병을 고쳐 놓으시고, 사단을 십자가에서 무력화 시키 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랑은 영광된 사랑입니다.
요12:23~24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니라.’가 하십니다. 주님은 희생하는 그 사랑 안에서 엄청난 영광과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시중들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지겨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자녀를 뭐 하러 낳아서 이 고생을 한담!’ 한다면 이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나의 으뜸가는 기쁨이란다. 너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나의 자랑이란다. 네가 자라 유익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내 수고는 영광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된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질, 사랑의 성격이 주님의 제자됨과 직결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스스로 진단해 봅시다. 사랑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섭섭함, 원망, 미움, 절망감이 가득합니까? 사단의 자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까?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서 낙심합니까? 결과를 걱정하십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솔직히 시인하고 새롭게 시작하십시다. 세상의 문제가 사랑의 결핍, 사랑의 변질이라는 것을 깨달읍시다. 병든 사랑이 문제임을 인식하십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십시다. 그럴 때에 엄청난 기쁨과 행복, 사랑의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