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26-31, 11:19-26 ㅣ 김남수 목사]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은 주님의 약속을 깜빡 잊고 안주하여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 핍박으로 스데반은 순교하게 되었고 믿는 성도들은 천하 각국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로 안디옥 교회와 바나바 사울에 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헬라어를 잘 구사하는 유대 기독교인을 뜻합니다. 헬라어는 그 당시 세계 공통어였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가는 곳마다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흩어진 헬라파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였기에 헬라인, 유대인,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자, 이 소식을 예루살렘교회가 듣고 교회의 일치성과 연합을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파송을 받고 안디옥 교회에 온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행11:23)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행4:36, 37) 그는 행11:24절을 보면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경건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은혜가 충만할 때에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두어 구제한 사람입니다. 은혜를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부흥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바나바는 함께 교회를 섬길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행11:25~26절을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가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울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변화된 바울을 알아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전에 예수 믿던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크게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중생하였고 변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믿고 나서 자신을 ‘적은 자란’ 뜻으로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사울과 바울은 동일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사울 즉 바울을 천거하고 그를 데리고 안디옥교회에 와서 같이 일 년 동안 동역했습니다. 그동안 ‘제자들’, ‘성도들’, ‘형제자매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럼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들이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비방하면서 붙여준 것입니다. 즉 ‘예수님밖에 모르는 사람들’, ‘예수쟁이들’라는 의미로 붙여준 것입니다. 교만한 유대인들이 자신들과는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결국은 이때부터 유대종교에 종교적 분파인양 되어있던 기독교가 비로소 ‘기독교’로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그때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하나로 취급되었습니다. 즉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겼습니다. 예수를 중심한, 예수님만을 높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생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마침내 새로운 의미의 교회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바나바와 바울, 두 지도자의 가르침을 일 년 동안 받고 나서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일 년 동안 바나바와 바울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자란’ 바로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어떻게 그분을 따를 것인가를 배운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핵심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의 전달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1장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불과 훈련 받은 지 1년 밖에 안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냄새,향기를 나타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재판을 받으면서 아그립바왕 앞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전도하였고 아그립바가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느냐’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들이 모든 삶의 기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 11:20, 21절을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리라’
즉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복음을 증거 하므로 고난에 동참하고 뿐만 아니라, 지도자인 바나바를 따라 착한 삶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행 4:36~37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그 이름 뜻 그대로 사람들을 만나면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필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자기의 재산, 밭까지 팔아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의 역량을 본받아 안디옥 교회는 큰 무리가 더해지는 부흥이 일어났고 이런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바나바와 같은 격려와 위로를 소명으로 알고 전도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별명으로 얻은 바나바라는 이름처럼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릅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필요로 할 때 바나바처럼 서슴지 않고 지갑을 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가 역사 속에 남긴 가장 놀라운 도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 그리스도다운 그리스도인 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바나바에 초점을 맞춰 바나바는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나 바나바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만 알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으로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바나바와 바울에 관해 잠깐 말씀드렸는데, 안디옥에서 1년 동안같이 가르치다가 1차 세계선교 여행 때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다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선교의 발동이 걸려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해보면 처음에는 바나바가 주도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도 바울이 높아지고 바나바는 뒤로 사라집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왜 이렇게 믿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함께 하시며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잊어버렸습니다. 전적으로 바울을 믿고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낮추고 바울을 높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종으로, 역사하는 종으로 높이고, 자신은 사라집니다. 그러하므로 바울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바나바가 바울의 후견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의 권위로서 바울의 신분을 보장했고, 동역하면서 주의 일을 어떤 의미에서는 가르치기도 하고 권고하고 인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어떻게 지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지도자를 알아볼 줄도 모르고, 키울 줄도 모르고, 지도자를 믿어주지도 않는 곳에서는 지도자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지도자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이 바울 되게 하는 데는 바나바의 후원과 신분의 보장 그리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굳게 서도록 한 인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각 목장에서 목자는 예비 목자를 바나바가 바울을 세웠던 것처럼 한 명씩 세워 가십시오. 그러면 목장은 배가될 것입니다. 바나바는 큰 인물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일을 한 것도 훌륭하지만, 다른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하게 한 것은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바나바는 이래서 위대합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를 이렇게 세워놓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이 됩니까!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다소에 그냥 묻혀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나바는 젊은 지도자 바울을 믿어 주고 후원해주고 격려하고 세웠던 사람, 때가 차면 미련 없이 물러설 줄 알았던 경건한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지도자를 지도자 되게 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예봄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