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1-8 ㅣ 김남수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 현실세계에 있었던 사건을 예로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은 마지막 때의 환란에 대하여 예언적인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에게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장차 세상은 극악해져 소돔과 고모라와 같을 것이며,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하는데 낙심치 말고 인내로 계속 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전 5: 17절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쉴 수 없고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다 중단할 수 있어도 기도는 끊을 수 있는 핑계가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삼상 12:23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아침에 우리에게도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하다가 쉬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죄는 하나님과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죄 많은 이세상 - 죄는 영력을 소멸시키고, 하는 일들이 매여 풀리지 않게 하며 기도를 막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관계에 소원해진 것을 겸손히 마음을 낮추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지나친 역경이나 과로로 인한 피로 등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희미해지면 기도를 쉬게 됩니다.
말세를 사는 현대인들이 바쁘다 보니, 한번 쉬고 두 번 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별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부정입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할 수 있고, 내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때문에 낙심하게 되고 그래서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3) 또한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지쳐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 기도할 힘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4) 가장 무서운 이유가 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 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만 같단 말입니다. 예수 안 믿고, 기도 안하는 저 사람도 잘 살지 않는가? 하는 생각.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놔버리면 마귀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히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도 될 것 같은 이 무서운 교만이 기도를 쉬게 하는 시험에 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금년에 성도님들이 일어나려고 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열심히 기도의 불을 붙여 적용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낙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할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또한 과부 한 사람이 있어 재판관에게 찾아가 ‘나의 원통한 사연을 들어주시고 공정한 재판을 하여 주소서’라고 부르짖었으나 이 재판관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자주자주 나와서 간절히 부르짖고 그를 번거롭게 하니, 그가 나중에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와서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늘 와서 나를 번거롭게 하리라 하였느리라’ 하며 굴복했습니다.”(눅18: 1~5)
이런 비유를 드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눈18: 6~8)”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절망적이고 낙심되는 일이 있다 할찌라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성경은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 3)”고 말씀하셨고. 또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그러나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 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너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절망이 되고, 낙심되는 자리에 있다 할 지라도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 과부의 비유를 통해 절망과 낙심을 극복하는 신앙인의 의지. 기도에 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한 과부
과부는 남편을 잃고 외로운 사람이요,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과부라는 말을 들으면 기억에 떠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목수일을 하며 근근히 끼니를 이어 가는데, 어린 자녀는 넷이나 되고 생활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단칸방에서 사는데 남편이 간암이 걸려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과부가 되어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이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만 합니까? “라고 절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하소연 할 곳이 없습니다. 그는 재판관에게 찾아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들어 주지를 않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과부쯤은 무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 하소연하는 과부는 그야말로 무기력합니다.
그저 자주 와서 도와달라고 하소연 할 뿐, 저를 설득할 만한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자주 그에게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 삶에 큰 손실을 당해 망연자실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이여 나의 원통한 사연을 들어 주옵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업상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원망과 원통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와서 통곡하고 부르짖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마음이 공포와 분노에 떨게 됩니다.
삶에 다가오는 크고 적은 손실로 인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인간은 두 길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낙심해 버리고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해 버리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용기를 내어 다시 제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어려움에 부딪혀 낙심하고 절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가 낙심될 때 주님께 기도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곧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위대한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임하여 아이디어를 얻으면, 그 고통과 파산이 크나큰 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 불의한 재판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불의하고 사람을 짓밟고 억울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이와 같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비유하셨을까요?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에게 비유할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재판관의 하는 말이 “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는 것입니다.
계속 와서 너무 번거롭게 하니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귀찮고 피곤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기도를 안 하는 것에 대한 경종으로 이런 잘못된 동기에서라도 들어 주는 데, 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겠느냐?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물며”라는 여기에 오늘 말씀의 초점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으냐? 마7: 11절에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아니않겠느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1)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를 들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따금씩 낙심이 큰 파도처럼 다가 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은 믿음의 반대현상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느 정도까지 낙심하지 않고 믿는가를 시험해 보시고 믿음의 척도를 삼으십니다. 그 믿음의 척도가 확정되면 하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신앙을 잃는 열쇠가 낙심인줄 알고, 사람을 낙심시키려고 달려듭니다.연약한 인간은 낙심하면 무너집니다.낙심해서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낙심은 우리의 생활 속에 가장 무서운 적이자. 우리 영혼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생활을 개발시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2) 또한 우리는 낙심이 다가올 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든지 환경이 어떻게 되든, 내 기분이 어떻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시면 왜 독생자를 보내 죽이셨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낙심이 다가올 때, 우리는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갖고 힘차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고 기도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번거로울 만큼 계속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성경에는 이 과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기도했다고 합니다. 재판관이 번거로울 정도로 부르짖고, 재판관이 괴로울 정도로 간청했다는 것입니다.그러니 그가 어느 정도 였겠습니까?
“ 그가 얼마 동안은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늘 와서 나를 번거롭게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고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겠느냐. 너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 없는 자가 되니 않고, 끝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내가 말세에 다시 올 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말세의 사람들이 인내하다가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기 때문에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로 물러가 기도를 쉬는 신자가 되지 말고, 앞으로 믿음을 가지고 믿고 나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승패는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믿고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죄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게 된 이들은 말하기를 “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줄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단 3:17~18)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근원이십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매달려 기도하고 승리하는 예봄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