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29-31, 디모데전서 2:1-4 ㅣ 김남수 목사]
아프리카 작은 산골 마을에 한 선교사님이 들어가 마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님이 가르쳐 준 대로 기도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 자기만의 기도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이상 그곳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어느새 마을에서 기도처에 이르는 곳까지 여러 개의 기도길이 생겼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 길을 “각자의 기도 길”, 혹은 “나의 생명 길”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기도를 게을리하여 기도처를 찾지 않으면 그 기도길에 풀이 자라납니다. 그러면 신앙의 친구가 찾아가 조용히 이렇게 말해 준답니다. “ 형제님 생명 길에 풀이 많이 자랐어요” 그래도 변화가 없으면 그의 친구 몇 사람이 대신 그의 기도처를 찾아가서 기도해 준 다음 그들의 친구를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형제님 우리가 형제님의 생명 길을 닦아 놓았어요, 주님이 거기서 형제님을 기다리시는데 저희가 함께 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그 형제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하며 기도의 회복을 도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는 서로 기도하라”
첫째,사역의 우선순위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목회사역의 후계자와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 사역의 실제와 정신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1절에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첫째의 의미는 둘째, 셋째가 없는 것으로 보아 순서의 첫째가 아니라, “우선먼저” 또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강조한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목회사역의 우선 순위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기도’입니다. 목회는 결국 사람의 영혼을 돌보고 사람을 섬기는 일인데, 바로 그 섬기는 대상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대상인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에 설교와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설교와 가르침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의미 있는 일들은 모두가 설교 보다도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져 온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공동체” 이상으로 “기도의 공동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기도를 사역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보기도의 불을 다시 일으켜야 할 이유이고, 목장에서 나눔에 이어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 없이 나눔으로만 목장모임이 끝난다면 우리들의 목장교회는 “넋두리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와 아픔과 좌절을 나누고, 그 문제들을 안고 주께 나아와 엎드려 기도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치유의 순간이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 많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암병, 심장병, 간염, 두통, 부인병 등 많은 간증거리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치유의 역사는 일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목사님의 안수기도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이 목장에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목장에서 치유가 일어날까요? 참된 교회생활은 “신앙고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어우러짐, 이것이 바로 교회의 코이노이아입니다. 이런 코이노이아의 진정한 깊이는 우리들의 교제의 장에서 우리가 자신의 실패와 허물을 얼마나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 삶의 상처가 드러날 때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 갈 수 있습니다. 목장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체 상의 하나가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목원들이 자기 자랑만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죄와 실패를 고백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이루어 지기 위한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상호 신뢰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열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비밀이 지켜지고 목원들이 기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자기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자기 내면의 이야기가 동네에서 가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들의 목장 교회를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갈 책임이 있습니다. 구성원 상호간에 신뢰할 수 있을 때, 우리들의 목장 교회는 고백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를 신뢰하며, 자기의 죄와 실패를 고백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모임 중에 임하셔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모든 질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질병은 분명히 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죄가 고백되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장벽이 제거되고 주께서 오셔서 치유하심으로 치유가 시작됩니다.
나의 체면이나 위신을 생각하고 교만하게 죄와 허물, 실패를 은폐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죄의장벽이 주님께서 오셔서 치료하는 것을 막는 벽이 되기 때문에 치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절의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 말씀이 바로 그에 대한 해답입니다.
둘째, 우리의 관심의 우선 순위는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어야 할 대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다 기도해 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2:2절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우선 순위의 대상을 보여 줍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높은 사람들” 곧 “지도자들”입니다.왜 그럴까요? 그들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지도자를 위해 기도를 명하는 것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지도자를 위해 기도를 명하는 것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정적인 결정들이 바로 나 자신의 유익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2하반절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환경적으로 고요하고, 내적으로 평안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지도자를 위한 기도의 우선 순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앞으로 대통령 선거가 100여 일이 채 못 남았습니다. 우리는 “ 정직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학연이나 지방색을 따라 귀중한 한 표를 찍을 것이 아닙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요하고 평안한,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나라가 잘 될 것인가? 를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 사람에게 귀중한 한 표를 찍어야 합니다.
지도자를 위한 기도, 그것이 우리 관심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일보다, 앞서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여러분의 남편의 회사 사장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유익이 우리 모두에게 돌아 옵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장에 고요와 평안,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에베소서. 골로 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에서 성도들에게 계속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3절에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며, 응답 주시기를 기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지도자를 위한 기도 내용의 우선 순위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바른 판단으로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 먼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전서 2:4절 말씀처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예수님을 안 믿는 지도자들에게도 간섭하셔서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섭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보다 자유롭게 그의 인생을 다스리고 간섭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자유롭게 쓰실 만한 의인이 되면 그 나라와 공동체는 크게 번영하고 흥왕할 것입니다.
잠언 14:34절에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단지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효율적인 전도방법은 “기도”입니다.
YWAM 같은 세계적인 전도 단체의 선교 제 1전략이 전도가 아니라 “중보기도”입니다. 전도 나가기 전에 먼저 중보기도하고, 전도현장에 가서도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중보기도하고 한 팀은 나가서 전도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역할을 바꾸어 중보기도한 팀이 나가 전도하고, 전도했던 팀이 오후에는 앉아서 중보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도 목장에서 각자가 전도할 VIP를 먼저 기도하면서 정하고, 그리고 관계를 세우기에 앞서서 먼저 VIP들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관계를 맺어 함께 추수하여 영혼을 건지십시다.
동독과 서독을 막고 있는 벽이 베를린 장벽이었는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통일을 가져온 것이 기도라는 것을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당신 구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고르바쵸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희랍정교 교인”이었습니다. 1989년 5월부터 라이프찌히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에서 소수의 성도들이 퓨러 목사님의 인도하에 “독일 평화 통일을 위한 촛불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 10월 9일에는 경찰의 집회 방해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까지 차단하여 모이지 못하도록 했지만, 교회내부에는 2,000명, 밖에는 10,000명이 모여 기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도회를 끝내고 거리에 나와 평화행진을 시작했을 때,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고, 경찰은 그들에 대한 통제를 아예 포기했습니다.그리고 한달 후인 1989년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그때 소련지도자 고르바초프는 공산치하에 있는 동독인이 장벽을 넘는 것을 동독이 막지 못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인데 구 소련의 해체와 연합국가들의 독립을 허락했습니다. 독일이 통일이 된 것은 무기나 총칼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위나 데모가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합심한 간절한 지속적인 기도와 공산권 최고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기도가 독일의 통일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지도자 고르바쵸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교회는 민족의 소망입니다. 교회는 소 그룹 공동체인 우리 목장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가운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가적으로 우리 교회적으로 볼 때, 우리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 모여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