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9 ㅣ 김남수 목사]
“내가 만일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처럼 노래하고, 내가 만일 종달새라면 종달새처럼 하늘을날 터인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끝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나의 창조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사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어느 시인의 시입니다.
이사야 43: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찬양을 온전케 하고 찬양을 진실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찬양을 생활화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오늘 본문 에베소서 5:19절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합니다.
주의할 것은 여기에 쓰여진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단어들이 모두 현재 분사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그렇게 찬양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저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찬양하는 생활을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경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설교자 켄트휴스라는 분은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찬양을 허락 하신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증거중의 하나가 “찬양하고 픈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에 신화를 남긴 「허드슨 테일러」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간증입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자신의 구원에 관한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서재에서“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이라는 소책자를 접하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와 다았습니다.
만일 전체 나의 구원이 다 이루어졌고, 전체 빚이 다 갚아졌다면 내가 해야 할 남은 일은 무엇인가?
그때 성령께서 내 영혼 속에 빛을 번쩍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일이라고는 무릎을 꿇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구원의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일도 전혀 없다는 즐거운 확신이 샘솟듯 했다.
나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찬양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찬양의 은사로 받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권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찬양을 잘하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천국은 찬송으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찬송을 잘하는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며 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 마음이 기쁘고, 선해지며,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가족이나 셀에서 모여 하나님을 찬양 할 때, 하나님께서 영화로움을 느끼시고 자신의 임재를 우리가 체험하고 느끼도록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셀로 모일 때 찬양을 많이 드리십시오.찬양하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 모임이 들어가게 되며 마음이 열리고 친밀한 교제와 나눔이이루어집니다.
초대교인들은 집에서 모여 서로 교제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찬송했습니다.그들의 이 즐거운 모습을 보고 날마다 주께로 나오는 사람이 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영화로움을 느끼시고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쁘게 살기 원하시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찬양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5:19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선 찬송의 여러 유형이 있는데 시, 찬미, 신령한 노래가 그것입니다.물론 구별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자 F.F 부르스는 시의 초점은 감사로, 찬미의 초점은 고백으로(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가에 대한), 신령한 노래의 초점은 우리의 간증으로 보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찬송은 감사요, 고백이요,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싶을 때, 고백하고 싶을 때, 간증하고 싶을 때 찬양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찬송을 해야 할까요?먼저, 마음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19절에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라”고 했습니다.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마음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감사와 감격과 사랑을 입술로 고백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9:14절에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이 바로 찬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본문에 “화답하며”는 영어로 “speaking to one another”인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말합니다.요컨대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고 간증하는 것도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셀 모임에서 나눔 자체가 바로 찬송인 것입니다.
셀 모임에서 특별히 찬송이 풍성했으면 합니다.
또, “찬송하다”는 말은 영어로 “making melody”인데 생각해 보면 악기를 동반한 찬송을 의미합니다.
시편은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고로 춤을 추며 찬양하라고 합니다.시편은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찬양하고, 입술로 찬양하며,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춤을 추며 찬양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셋째, 찬양의 전제 조건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본문 19절은 전후 문맥을 볼 때 성령충만의 결과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성령 충만하면 찬양하게 되고, 찬양하면 성령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서 찬양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샘솟습니다.
가장 위대한 찬송 작가들 역시 시인들이 아니었습니다.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터는 위기를 만날 때 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내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찬송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실로 감동적인 여러 찬송을 남겼습니다.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루터가 친히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요한 웨슬레 형제」도 수 없이 많은 찬송을 남겼습니다.
찬송은 곧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쁘면서도 그렇게 많은 찬송을 남길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말씀을 읽은 후 찬양시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찬송시를 남겼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함께 찬송가에 가장 많은 찬송시를 남긴 「패니 크로스비」는 무려 8,000곡 이상을 남겼는데그녀는 “나의 기도가 나의 찬송”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찬송이 나옵니다.
찬양하기 원한다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찬양이 곧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을 생활화해야 합니다.예배 때 만이 아닌 평상시에 늘 찬송해야 합니다.
넷째, 찬송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합니다.
악귀 들린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이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악귀가 떠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러 다닐 때, 그의 얼굴을 보면 그를 괴롭히는 귀신들린 여자하나가 있었습니다.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벌어 주는 여종이었습니다.여종은 끈질기게 바울을 따라 다니며 바울을 괴롭힙니다.
바울은 참다 못하여 귀신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느니 그에게서나오라”하고 명령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 아주 깨끗하고 말짱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돈줄이 끊긴대 화가 났고, 이런 것으로 해서 바울을 감옥에 쳐 넣게 됩니다.
바울은 재판도 받기 전에 많은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그는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바울이 찬송을 부를 때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바울이 기적을 바라고 찬송한 것은 아니지만, 찬송함으로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6.25때 일어난 실화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한 청년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바로 총살 당하게 되었습니다.
총살 직전에 인민군이 말합니다.“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 그래서 그는 “찬송 한번 부르겠습니다.” 인민군은 ”그래 마지막 소원이니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는 찬송을 목청껏 불렀습니다.
1절을 마치고 2절을 부르기 시작할 때 “탕 탕”하고 총성이 울렸습니다.“아이쿠 이제 나는 죽는구나”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지 청년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왠 사람의 등에 업혀서 남쪽으로 오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그 인민군 가운데 장로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 청년의 찬송을 들으면서감동을 받았고, 감동한 나머지 옆에 서 있는 다른 인민군들을 다 사살해 버리고 그를 업고 남한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남쪽으로 와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극적인 모습입니까?
여러분!
가장 위험할 때 찬송을 부르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럴 때 옥문이 열리는 것입니다.간수가 문 앞에 엎드려 벌벌 떨면서 바울 보고 어찌 할꼬 부르짖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어디다 비교하겠습니까?
감사와 찬송에는 창조적 능력이 동반합니다.기적을 부릅니다.
여러분!
바울은 기적이 있어서 찬송한 것이 아닙니다.
찬송이 있어서 기적이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감옥 같은 세상을 삽니다.어두운 부자유한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높이 높이 솟아서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할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볼 것입니다.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