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 13-21 ㅣ 김남수 목사]
교회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가정은 아름다운 정원처럼 잘 가꾸어야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으로 세워져 갑니다. 가족이 사랑으로 격려하고 서로 참아주며 양보할 때,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정은 쉼을 얻고 서로 격려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곳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서로 세우는 가족, 양보하는 가족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전직 미국 지미카터 대통령이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해비타트”즉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일”입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며 열심히 일하는 카터에게 “일하는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한채의 집을 지을 때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말씀도 우리가 서로를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집을 헐고 있거나 세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은 세우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사명은 교회 즉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롬14: 13~21 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서로 세우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은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으며, 4절은 “연약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세움”리라는 단어는 “오이코 도매”인데 “오이코”는 “집”,”도매”는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세우는 일은 이웃의 집을 세우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가족 이웃을 세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이웃을 세우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판단치 말아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롬14:1~12절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유 할 수 있는 삶의 영역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은 의견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예컨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혹은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와 같은 문제입니다.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충분히 자유 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들로 언쟁을 하다가 갈라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아직도 너무도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유리창의 선텐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인가 의논하다가 다툼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가 교회가 갈라셨습니다.
이러므로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바울 사도는 “서로 판단치 말라”고 합니다.
한 미국교회에서도 싸움이 났는데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서 보신탕을 먹었다고 간증한 후 이런 선교사를 계속 후원해야 할 것인가를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비본질적인 모든 주제들의 논쟁에 대해 “서로 판단치 말라”고 가르칩니다. 사실상 이런 논쟁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문제로 어떤 형제를 근심케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롬14장 15절의 “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는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둘째, 이웃을 세우기 위해서는 믿음이 강한 성도가 양보해야 합니다. 롬14: 2절에 의하면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채소만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다른 문제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흡연문제가 신앙의 수준을 정하는 규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 드리면 담배문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될 때, 처음에 시골 사랑방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긴 담뱃대에 담배를 가득 담아 마구 담배를 피워 선교사님들이 생각해보니 공기도 매우 탁해지고 건강과 폐에도 안 좋으니 건덕상 담배 안 피워도 될 것 같아 담배 피우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담배문제가 신앙의 수준을 정하는 규례처럼 되어왔습니다.
오늘날은 한국 정부에서도 대형음식점이나 공공장소를 금연구역으로 법으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하고 있습니다이런 이야기가 혹시 어떤 교우들에게 충격이 될 지 모르지만 설교의 황태자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스펄존 목사님이 골초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펄존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근처 담배가게에서 매상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스펄존 목사님이 잘 피우는 담배를 파는 집”이라는 선전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이 소식을 스펄존 목사님에게 전했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제는 내가 담배를 끊을 때가 되었군요”라고 반응했습니다.그리고 실제로 담배를 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한 성도가 “목사님 담배 피우는 것이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왜 끊으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나는 상관이 없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우게 되고 건강을 해친다면 내가 삼가야 지요”라고 했답니다.
롬14: 20,21절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담배도 피울 만큼 자유롭고 강한 믿음을 가졌던 스펄존 목사님이 담배를 거리낌으로 대하는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위해 담배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음식물 먹는 문제가 나왔으니 제사음식 먹는 문제도 이 시간에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을 해 봅시다. 이 문제도 우리나라의 담배문제 처럼 건덕에 관한 양심의 문제이지 신앙의 본질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고전10:4~13절까지 말씀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오.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로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들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상은 즉,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나무조각이나 돌 쇠붙이 불가한 것입니다.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재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을 더러워지거나 믿음이 약한 자가 넘어지게 해서는 안되니 자유를 조심하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하여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믿음이 강했지만, 자신이 먹는 음식이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므로 형제를 실족하기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양심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되면, 안 먹는 것이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으나 자신이 먹는 것이 형제를 거리끼게 하거나 실족케 한다면 안 먹는 것이, 즉 양보하는 것이 바울처럼 매우 잘한 것입니다.
셋째, 이웃을 올바른 세우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신앙의 논쟁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열을 올리고, 열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치논쟁이 있습니다 .각자 배경, 인생경험에 따라 옹호하는 정치적 경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도 여도,야도 있어야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우리들의 교제가 상처를 받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문제를 피해가지 않으면서 우리 교제의 깊이를 더해 가는 방법이 없을까요? 서로 이해하고 마음의 폭을 넓혀 양보하면서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롬14: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무슨 말입니까?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와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입니까?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어떻게 의롭게 살고, 평화롭게 살고, 기쁘게 살 수 있느냐? 오직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한 기자가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 “지미카터”에게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소감이 어떠한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마치고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대통령이 아닌 이웃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분이 우리나라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소망합니다.“해비타트운동” 즉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은 본래 「밀라드 폴러」라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는 이미 28세 때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가 이혼 선언을 하면서 떠나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 돈이 전부인줄 아는 당신의 인생에 환명을 느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진지한 사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의 코이노이아 농장을 방문하고 인종을 초월한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옵니다.
그는 돌아온 즉시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고, 곧 자기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 그러니까 자동차, 보트, 자가용 비행기, 모두를 팔아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졸지에 백만장자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는 행복을 찾았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받는 “자유의 메달’과 “마틴 루터 킹의 인도주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해비타트 한 관계자는 책에서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 그는 욕심을 버림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는 물질을 포기함으로써 가치를 발견했고“
”그는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행복을 얻었으며“
”그는 쾌락을 잃어버린 대신 영향력을 남기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특권과 물질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그리스도의 희생,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그리스도의 섬김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라면 이제 우리도 이웃의 덕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밀라드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가리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밀라드 풀러」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가리켜 “망치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새 삶을 체험한 그는 새로운 삶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삶을 세워주는 일생을 살기로 한 것을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망치로 못 받은 것에 빗댄 것이지요
이제 그의 영향을 받은 “지미카터”가 사랑의 망치를 들고 이웃의 집을 세우고 그들의 새 인생을 세워주는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겨워 하는 이웃을 세우기 위해 꼭 망치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 셀 그룹으로 모여 기쁨과 승리를 나누며, 같이 웃고 즐거워하고 또한 마음의 짐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서로 들어주고 받아주며 이해해 주고 격려와 위로를 하며 치유를 위해 서로 붙들고 기도할 때 구주께서 함께 하시므로 치료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 교제할 때 치유와 활력을 얻고 다시 세움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셀 모임이 그리워지고, 모이게 되며, 치밀한 영적인 가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는 새 힘으로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를 전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셀 교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따뜻한 말 한마디, 정겨운 악수,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 변함없는 관심, 소리 없는 다정한 미소, 이러한 모든 것으로도 우리 이웃들의 인생의 집이 새롭게 지어져 갈 것입니다.
저는 예봄교회 성도님들의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런 삶을 원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원하기 때문에 서로 먼저 양보하고 서로가 세우기를 작정하고 서로 먼저 다가가면 됩니다.발상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봄교회 성도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세우는 인생을 사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