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1-12 ㅣ 김남수 목사]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행하였느냐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설교전문
“스텐버그의 십자가”라고 하는 그림은 기독교사에 뛰어난 명작입니다.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스텐버그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성베드로성당의 ‘위고’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관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얼마동안 그리다가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기 시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림값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다는 불만때문이었습니다.
그림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습 니다. “페피타”라고 하는 여집사님을 모델로 세속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쉬게 될때, 모델 페피타가 초벌만 되어있는 그림을 보면서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설명하기를 예수님이 배들레헴에 오셨고, 많은 병자를 고치는 등 착한일을 하시다가 이렇게 저렇게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페피테는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냥 눈물을 흘립니다.
하도 슬퍼하니까 스텐버그는 그 여인을 위로할 마음으로 “울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 셨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으니 울지 마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눈을 번쩍뜨면서 “진짜에요?” 정말로 부활하셨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스텐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만백성을 위해서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 생명력을 얻는구나!!
그런데 나는 어떤가? 정작 나는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천연스럽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나는 과연 그것을 믿는 것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여기서 부활신앙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다시 흥정을 하겠다고?
“ 그는 이 나쁜놈아~! 라고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을 회복해서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텐버그십자가는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사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의 용기를 봅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충만할 때, 그는 5,000명을 회개시키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매 맞을 때에 더욱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앞에 있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핍박과 곤욕을 치를 때에도 “하나님앞서 너희 말을 들어야 옳으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옳으냐? 너희는 판단하라”고 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칭찬받기 좋아하고, 앞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전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서 많은 사람이 베드로를 신을 대하는 것처럼 우러러 보고 있을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가 이 병을 고친 것처럼 왜 나를 쳐다 보느냐?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일으켜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이, 즉 예수님이 이를 낫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10절에도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있느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 명예, 자기 교만이 싹 사라지고, 주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유와 겸손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으러 하자 그는 아주 여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감히 내가 어찌 제대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소? 나를 거꾸로 매달아 못박으시요”
비겁한 베드로가 어떻게 하여 이렇게 될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또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함께하는 부활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기 위해 다메섹까지 쫓아가던 잔악한 사람 사울은 어떻습니까? 그가 성 바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사건 하나로 그토록 완악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의 관계입니다.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내가 부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것은 생명의 세계로 문을 연 것이며,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유명한 교수가 선다씽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 당신은 뿌리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요, 또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까?”선다씽이 중요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 끝인데, 기독교인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생명주시는 분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카타콤속에서 살았습니다.
왜? 부활신앙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무상통을 했습니다.
내 것을 내것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서 집잘짓고, 옷잘입고, 권세 누리고,……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속에서 깨끗하게 공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 앞으로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이 아니고서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가노라면, 사도들이 용기가 있고, 교인들은 유무상통하는 도덕성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활신앙으로만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믿었습니다.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지금 체험할 때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이기심이 사라졌습니 다. 세상에 화려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을 살든 이 복음을 증거하다 가 주님 앞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특별히 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믿고 부활신앙이 약해지면 간간히 어려움을 당할때부활신앙이 다시 부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성령이 충만할 때 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할때, 부활신앙이 다시 솟아 납니다. 죽은자도 살리며,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는 핍박속에서 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는 아무래도 신앙이 좀 약합니다. 핍박을 받아야, 또 간간히 핍박을 받아야 정신도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핍박없는 신앙생활이란 맥빠진 것입니다.
사도들도 핍박을 받게 되니까 반 역동적으로 점점 강해집니다.
얼굴이 환한 천사 얼굴이 되고, 기탄없이 용기있게 말하게 되고, 그뿐만 아니라, 매를 맞고 죽어가면서도 “ 하나님 앞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옳으냐?”고 큰소리 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핍박속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틀러때에 순교한 본훼퍼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나는 나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감옥에서 나는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핍박속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시각에도 그는 말합니다.“이제 끝났다.
이것이 내 생명의 시작이다”핍박과 환난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확실하게 체험했고. 부활신앙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렇게 확신할때, 이적이 나타납니다. 많은 이적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고, 죽은 다비댜를 살렸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이름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용기를 얻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많은 여려움을 겪습니다.
이럴때 우리는 부활신앙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활사건에 대한 논리, 과학적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 확실할 때 용기가 있고, 어려운 고난속에서도 소망을 갖고 위로를 받습니다.
부활신앙이 확실할때, 미래가 보이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또한 가야할 길도 환하게 보입니다.
부활신앙이 새롭게 부활하는 역사가 이 아침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