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목사]
어느 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한 청년이 자기를 위하여 애쓴 부모님, 특히 그동안 열심히 기도한 어머니를 차마 볼 낯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만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가출해서 그는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마는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편 청년의 부모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한 달여 후에야 간신히 아들이 달동네의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서 자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장에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찾아가 보니 아들은 어디가고 없었고 방이라고는 말도 못하게 엉망인데다가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방을 청소해 놓고 그 방 한쪽에 놓여있던 냉장고 문에다 아들의 백일 잔치 때에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딱 붙여 놓은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저녁에 돌아온 청년은 깨끗이 치워져 있는 방과 냉장고에 넣어 놓은 음식과 백일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집을 나가지 말라고 말린다고 안 나가겠습니까?
돌아오란다고 돌아오겠습니까?아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 한다'라는 마음이 가슴에 와 닿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요, 거기에 창조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과 바른 지식 없이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사랑을 알아야 하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 내 생명을 온전히 위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이 으뜸의 덕이요, 으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부모가 드는 매에는 나의 이 아픈 마음을 이 간절한 사랑을 알아달라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4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
그런데 사랑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바로 되려면 이해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는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랑하는가? 상대방을 위하여 희생하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동시에 사랑받는 자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는가? 겸손하게 받아들였는가? 받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언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언어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하나님께서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게하심은 우리를 살려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혜로운 사랑의 언어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희생하노라.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서 너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주었노라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때에, 인간은 죄사함을 받아 자유하게 되고 치유받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그때부터 내가 사랑하겠노라, 앞으로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 어디에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네가 병들었을 때에 이미 네가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네가 나를 모를 때에 실패했을 때에도 너를 사랑했노라, 네가 죄 중에 빠져 있을 때마저도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을 때에 내가 채찍을 풀어 너를 일깨워 내게로 인도했노라'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라, 깨닫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환경을 말씀하심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뿐입니다.
내가 지나온 날들, 내가 당면했던 구체적인 현실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향하신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고, 믿고 당신께 전적으로 위탁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의 개념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결국에 사랑은 슬픔이 되고 맙니다.
슬픔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지식, 그것을 아는 지식, 그것은 바로 총명입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얼마나 답답합니까? 여기에 바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랑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엔 슬픔이 없습니다.슬픔이 있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아픔은 있으나 슬픔은 없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나에게 전달됩니다. 몸이 저려옵니다. 몸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가슴이 매여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슬픔이 아닙니다. 그 속에도 신비스럽게 사랑의 기쁨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랑의 미숙입니다.성숙되지 못해서 마음뿐이요, 생각뿐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고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여기에 답답함이 있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롬은 사랑의 성숙의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치할 때는 내가 사랑받으니까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성숙하게 되면 내가 사랑하여 비로소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사랑받는 것이 뒤에 있습니다.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또 유치한 사랑은 그 사랑의 동기가 이렇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 내가 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필요가 사랑의 근거로 나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I need you because I love you'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여러분은 어느 수준에서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불평이 많습니까? 마음을 아파하고 있습니까? 높은 차원에서 보세요. 사랑해서 끝까지 사랑해서, 사랑 받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나에게 필요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인이라고 하는 믿음이 좋은 학장님이 있었습니다.학생들은 그분을 높이 존경해서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이란 별명을 붙었습니다. 매일 천국에 다녀온 사람같이 밝고 명랑하고 은혜가 충만한 분이였습니다.어느 학생이 물었습니다.선생님은 어떻게 이렇듯 늘 평화롭게 늘 기쁘게 사십니까? 학장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은혜가 있으니 나는 기쁠 수밖에 내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덕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마음이 기쁘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숨길 수 없습니다.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에는 기쁨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알기까지는 기쁨이 없습니다.사랑하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랑하기에 인내도 가능합니다.참아서 사랑이 아니고 사랑하면 참게 되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사랑하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사랑은 절제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랑은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8: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이런 저런 일이 문제되지 않습니다.다 사랑으로 선을 이룹니다. 이게 사랑의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본질이요, 능력입니다.
또한 사랑의 용기와 강함이 지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사람은 그가 가진 지식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는 만큼 강한 것입니다.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사랑의 용기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고 있는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사람은 진실한 사랑만큼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기독교인의 사랑은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의지의 차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지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의지의 결단을 내리셨고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영국의 방송기자와 만나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방송 기자는 테레사 수녀에게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진실하게 사랑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 주는 것이 저들에게 필요합니다.단 몇 시간이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주는 것 이것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지혜요, 사랑만이 용기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만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진실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진실한 사랑이란 자발적이고 자원적이어야 합니다.머리로부터, 누구로부터 강요당해서 하는 사랑이라면 진실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사랑이란 억지로 짜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사랑해야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심령에 부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며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사랑의 삶을 살기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사랑할 만한 올바른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어거스틴은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이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고 사랑받는 자가 되면 얼마나 밝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우리 예봄교회 성도님들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고 모두 사랑받는 자 되어 아가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